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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un 27. 2024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영국에서 본 한국인

-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나는 한국을 떠나기 싫으니, 영국에 가려거든 혼자 가요." 


난데없이 영국에 가겠다 선언하는 남편에게 A가 한 말이다. 


아들 둘을 키우며 워킹맘으로 사는 일이 힘겹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적응해 가던 중이다. 아파트 대출금을 갚고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 빠듯한 월급이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남편과 자신 중 누구 하나 승진을 할 테고 그러면 지금보다 숨통이 트이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고 나온 셈이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생기겠거니 막연히 기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건 답이 아니다 싶어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기로 했단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몇 년이 걸릴지 모를 공부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고? 그것도 한국이 아닌 영국으로 가서? 


그럼...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어떻게 하고?

당장 대출금은 어떻게 감당하지?

영어도 못하는 내가 영국에서 어떻게 살라고?

주현이가 이제 겨우 어린이집 생활에 적응했는데, 말도 안 통하는 친구와 다시 어울려야 한다고?

나는 육아 휴직 끝내고 업무 복귀하면서 능력도 인정받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A의 남편은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아내와 의논하는 것을 최대한 미루었나 보다. 어쩌면 담당 교수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자신이 잘 해낼지 자신이 없어 침묵을 지켰는지 모른다. 


결국, A는 남편을 따라 영국에 오고야 말았다. 




영국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연이 있다. 


여름휴가 가듯 혹은 깜짝 파티하듯 즉석에서 결정해 떠날 수는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사연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영국에 오게 된 배경과 체류 기간, 가족 구성원에 따라 사연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들 전혀 다른 사연을 안고 영국에 오기는 하지만 이들이 몇 년간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니, 이들의 태도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편이 혹은 아내가 '우리 영국에 가서 살까?'라고 말한 순간부터 한국 -> 영국 -> 한국의 무대를 거치며 펼쳐지는 한 가정의 대서사시 주요 장면마다 나오는 가족의 반응이 이 공통점에 해당한다. 즉, 앞서 언급한 A와 같은 반응 말이다.


1. [영국 오기 전] 나는 한국을 떠나기 싫다. 가려거든 혼자 가라.

2. [영국 도착 후] 영국은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한국의 가족과 친구가 그립다.

3. 영국에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한국의 친구들도 나를 부러워한다. 

4. 주변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친구도 사귀기 시작했다. 

5.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고 영어도 잘하니 영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6. [한국 복귀 전] 나는 영국을 떠나기 싫다. 가려거든 혼자 가라.

7. [한국 복귀 후] 한국은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영국에서의 생활과 친구가 그립다.


개개인의 차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단순하게 구분해 본 단계이다. 나 자신도 일부 겪었고, 나 보다 먼저 영국에 정착한 이들의 이야기, 영국에 살면서 목격했던 다른 가족의 사례를 바탕으로 정리했을 뿐이다. 삶에서 겪는 특정 순간을 단순하게 정리해놓고 보면 아무리 어렵고 두려운 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1. 나는 한국을 떠나기 싫다. 가려거든 혼자 가라.


한국에서 출생, 성장, 교육, 결혼까지 거친 사람이라면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타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일단 두려울 수밖에 없다. 잘 살고 있는데 왜 갑자기 영국으로 가자는 거냐, 당신 혼자 가라는 반응이 나온다. 


언젠가는 돌아와야 하는 한국에서 다시 설 자리가 있을지 의문도 든다. 특히, 한국에서 경력을 탄탄히 쌓는 중이라면, 영국으로 가면서 생기는 공백을 어떻게 메우나, 고민될 일이다.  


이 단계에서, 서로 사정이 안되면 혼자만 영국에 가고 나머지 가족은 고국에 남는 기러기 가족을 선택한다.



2. 영국은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한국의 가족과 친구가 그립다.


국적 불문하고 영국에 처음 오는 이들 중 대다수가 하는 반응이다. 


영국에 왔더니 날씨도 안 좋고, 말도 안 통하고, 물가는 비싼데, 음식마저 입맛에 안 맞으니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 집 구하기는 더 힘겹고 통장 개설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병원 진료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가서 뭐라고 말할지 두려움만 가득하다. 


영어 전공자이면서, 영국에 오기 훨씬 전부터 부모를 떠나 타지 생활을 한 경험이 있던 나는 이 시기를 비교적 쉽게 겪어 냈다. 또한,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라 육아의 부담도 없었다. 


다행히, 아무리 영국에 대한 불평을 많이 하던 사람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이 단계를 극복한다. 물론, 개인마다 극복하는 시기는 다르지만. 


간혹, 영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계속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 만나서 털어놓는 주된 이야기가 영국에 대한 불평뿐이라, 솔직히 이들과의 만남이 꺼려질 정도다. 이런 사람은 배우자가 영국에서 취업이나 승진 기회가 있어도 이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복귀해 버린다. 혹은, 배우자는 영국에 남고 나머지 가족만 한국으로 가는 형태의 기러기 가족을 선택한다. 



3. 영국에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한국의 친구들도 나를 부러워한다. 


영국에 온 지 몇 개월 혹은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쯤 되면 영국 생활에 슬슬 적응하여 삶에 여유가 생긴다. 시댁/처갓댁 눈치 안 봐도 되고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했던 한국에서의 삶과는 딴판이 되었다. 영국인들, 왜 이리 느려터졌냐 불평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이들만의 일처리 방식에 적응해서인지 오히려 습관처럼 마음의 여유가 생겨난다. 


생각지도 못한 영국의 아름다운 풍경에 나만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산책하다가 찍은 평범한 동네 사진일 뿐인데 소셜미디어에 올릴 때마다 고국에 있는 친구들 반응이 장난이 아니다. 평생 꿈꾸던 유럽의 유명 도시를, 영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제주도처럼 저렴하게 후딱 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4. 주변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친구도 사귀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또 다른 한국인을 알게 된 뒤 한국어로 실컷 수다를 떨면서 해외살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어렵긴 하지만 영어를 공부하면서 외국인 친구도 사귀게 되니 영국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친구를 사귈 정도니 적응을 해도 아주 많이 했다. 이 단계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고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줄어든다. 너무나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해외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5.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고 영어도 잘하니 영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영국에서 버티고 살 수 있을지 고심하는 단계다.

 

영국에 오기 전만 해도, 아이가 새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영국인 친구들 사이에 주눅 들지 않을까 크게 걱정했다. 하지만, 아이가 기대 이상으로 학교생활을 잘하는 데다 공짜로 어학연수도 받는 셈이니 영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3, 4, 5번은 순서가 조금씩 바뀔 수 있다. 



6. 나는 영국을 떠나기 싫다. 가려거든 혼자 가라.


기껏 영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했더니 다시 한국으로 가야 한단다. 1번 단계만큼은 아니겠으나 이 또한 폭탄선언에 해당한다.


애초에 영국행을 결정한 배우자가, 영국에서 소망하던 목표를 달성했으니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금의환향할 날만 고대하고 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때론, 영국에서 소망하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귀국하는 경우도 있다.


학비 공급이 중단되거나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인해 유학을 포기하는 경우다. 또는, 학위를 취득한 뒤 영국 회사에서의 취업을 꿈꾸다 좌절하기도 하고, 실직하는 이도 있다.


이제 영국이 살만하다 느껴지고 영국에 남을 궁리만 하던 가족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어떻게든 영국에 남겠다 결심하고 기러기 가족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가족이 영국에 남고 배우자만 한국으로 가는 형태다. 하지만, 배우자의 교육이나 취업 때문에 비자가 발급되었을 텐데, 해당 배우자가 고국으로 복귀한 뒤 나머지 가족이 계속 영국에 체류할 방법은 애매하다. 



7. 한국은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영국에서의 생활과 친구가 그립다.


영국에서 계속 살고 싶어도 뜻대로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온 경우다.


주변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든다. 마치, 자신의 초창기 영국 생활이 그러했듯 말이다. 미세 먼지에 후덥지근한 날씨, 천정부지로 솟는 집값, 전셋값, 사교육비가 그렇다. 


영국의 느슨한 교육 방식에 길들여지고 모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해진 자녀의 학교 적응 문제도 있다. 이미 알고 있던 친숙한 문화이지만, 한국과 다른 환경에서 몇 년 살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셈이다.


이 또한 지나간다. 

영국에서의 적응 과정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말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Pixabay on Pexels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물론 이니셜까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각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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