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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영국에 살다가 문득 2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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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정숙진 Jul 12. 2024

다민족이 어울리는 장소에서의 대화

"져 남폰이 항국 사라임미다."

모두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리자 얼굴을 붉히며 케이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5~6명 정도의 한인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자리인데 이날 어쩌다 일본인 케이코가 합류했다. 늘 다양한 이야기 주제를 준비해 오고 간혹 새 멤버를 소개하는 역할도 맡은 A가 데려온 모양이다. 평소 모임 성격과 달라 생뚱맞다 싶긴 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아 했다. 다들 어느 정도 영어 소통이 가능한 데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리라. 고국을 떠나 사는 사람들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모였으니 큰 의미에서 보면 케이코가 못 올 자리도 아니었다.

갑자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진행하다 보니, 평소 목소리를 높여가며 각자의 주장을 드러내고 한 번씩 크게 웃기도 하며 활발하게 진행하던 모임이 이날만큼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영어 소통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멤버 모두 유창한 편은 아니라서다. 거침없이 수다를 떨기에는 영어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크게 웃고 떠들 일은 없어져 아쉽지만, 자신의 생각을 한 차례 더 정리한 뒤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그런데, 케이코가 한국어로 자신을 소개하고 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남편이 한국인이요 한국에서도 살았다는 말에, 지금껏 영어로 차분히 진행하던 대화 모드가 갑자기 한국어로 전환되었다.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누군가 '그럼 한국말 잘하겠네!'라고 외치고는 한국어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면서다. 늘 말이 빠른 편이라 그 뜻을 쫓아가려면 애를 먹는데, 사투리마저 쓰는 사람이다. 케이코의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틈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대부분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으로 구성된 멤버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투리는 외국인이 배우는 한국어와는 다르다. 이 두 언어 사이의 간극은 무시한 채 모두가 평소처럼 빠르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간단한 소갯말 정도만 듣고 그 사람의 언어 실력을 가늠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 홍보 차 한국을 방문한 배우의 간단한 인사말만 듣고 '그 사람 한국말 잘하네'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한국인과 결혼했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다고도 할 수 없다.

주변의 국제결혼 커플을 떠올려보라. 두 사람 모두가 배우자의 모국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이날 내가 참석한 자리에 모인 한국인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영국에서 몇 년씩 살았으니 영어가 유창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 현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한국인 배우자를 두었다는 이유로, 또 한국에서 살았고,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는 이유로, 한국어를 잘 알아듣겠거니 여기고 빠르게 소통한다면 외국인 멤버에게는 무리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토종 한국인도 헷갈려하는 사투리를 쓰면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케이코는 이날 자리에 앉아 묵묵히 주변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간혹 자신에게 향하는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는 했지만, 대화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영선씨가 마트에서 낯선 남자를 남편으로 착각하고 손을 잡아끌었다고 하네요."

옆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내가 덩컨에게 영어로 옮겨주는 중이었다.

여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데 덩컨을 제외하면 모두가 한국인이었다. 경험상, 이런 자리에선 다들 당연하다는 듯 영어를 사용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특히 술을 마시며 모임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자연스레 한국어가 더 많이 튀어나온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내 맞은편에 앉은 B가 한창 한국어로 열을 올리며 옆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영국에 사는데도 영어 실력이 안 늘어요',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나요?', '영어로 말할 기회가 어디 없나요?'라며 바로 한 시간 여 전까지만 해도 내게 호소하던 사람이 말이다.

이런 상황이 오리라 미리 짐작했던 걸까?

나는 이 자리에 오기 전부터 이날 앉을자리를 고민해 보았다. 부부 동반 모임이라 하더라도 부부가 따로 떨어져 지인들과 먼저 어울리는 분위기이기에 내가 원하면 어디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군중들 사이에서 혼자 이방인이 되어본 심정을 아는지라 자연스레 덩컨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도 영어로 진행되던 대화가 술잔이 몇 차례 돌고부터는 서서히 한국어로 옮겨갔다. 결국, 덩컨과 나는 계속 영어로 말하는 그룹이 되고, 나머지 일행은 한국어로 말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어색한 사이라 하더라도, 상대의 말에 먼저 귀 기울여주고 공통 관심사를 끌어내기만 하면 대화는 이어지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만난 덩컨에게 그와 주변 소식을 묻고 내 근황도 전하면서 둘 사이 이야깃거리는 순탄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한국어 그룹에서 일제히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익숙한 한국어 주제가 쏙쏙 내 귀에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덩컨도 이들이 뭘 이야기하길래 저리 웃을까, 에 관심을 쏟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두 사람만의 주제로 영어 대화를 이어가다가, 어느새 나는 한국어 그룹의 대화 내용을 덩컨에게 영어로 옮겨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며칠 뒤 덩컨의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이 수줍음을 잘 타는 데다 한국인과 어울리는 모임에 가면, 늘 혼자 외국인이라 대화에 끼지 못해 힘들어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덩컨에게 말벗도 되어주고 통역자로도 자처한 덕택에 남편이 주눅 들지 않았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연락했다고 한다.

**"@^# 38@R$!!(_^*)_+&...."**

라제쉬가 뭐라고 외치자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음을 지었다.

생일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인데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 집 부부 중 한 명이 생일을 맞았겠거니 할 정도로 어른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주인공은 아들의 학교 친구인 슈레야였다. 초등학생을 위한 파티임에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임에 심취하는 건 이들 민족의 특성인 듯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아들과 나를 제외하면 모두가 인도인이었다.

인도의 공식 언어가 10개가 넘는다는 사실은 이들과 어울리며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유난히 인도계가 많은 동네에 살다 보니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도 학부형으로도 만나곤 했다. 내가 만난 인도계 친구들은 힌디어, 벵골어, 타밀어, 텔루구어 중 하나 이상을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영어는 외국어로 익혔다고 했다.

그 좁은 공간에 30여 명 가량이나 모여서 몇 시간씩 먹고 마시며 신나게 놀 수 있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지만, 언어가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끼리 영어도 아닌 그 어떤? 언어로 한꺼번에 소통한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분명 누구는 인도 북부에서 왔다 하고 또 누구는 남부에서 왔다 했으며, 모국어도 카스트 계급도 서로 다르다 강조하던 이들이지 않은가.

그 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외국인인 우리 모자를 위해서라도 '제발 영어로 말해주십사'라고 호소하지는 못했다. 대신, 옆에 앉은 아쉬위니를 수시로 귀찮게 굴며 밀려오는 소외감을 막아보려 했다.

"방금 쟤가 뭐라고 했는데?"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학교나 직장, 지역 사회에서까지 다양한 민족 출신과 어울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민족, 다문화라는 말에 익숙해지고 있다. 모국어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이는 자리를 직접 마련하거나 혹은 그런 자리에 참석한다면, 누군가의 의사소통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언어 사용에 대해 고민해 보면 어떨까.

나도 그 어떤 자리에서는 소수 민족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물론 이니셜까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각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Samantha Gades on Unsplash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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