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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ul 19. 2024

우리, 도둑 아니거든요

"뭘 해 먹으라고 고기를 저래 썰어주노."


도마 위에다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올려놓고는 별 모양새도 없이 마구 썰고 있는 남자를 보며 엄마가 한 말이다.  


딸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낯선 영국땅을 밟은 엄마의 눈에는 주변 모든 것이 신비의 세계였다. 알파벳 몇 개와 숫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아보지 못할 문구로 가득한 영국 마트도 신기하지만, 내부 꾸밈 상태가 한국식도 영국식도 아닌 이곳 아시아 식료품점 또한 진귀한 구경거리였던 모양이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상점 곳곳을 둘러보던 엄마가 그 많은 구경거리 중 정육 코너를 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손님이 뜸한 틈을 타서 천천히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닭고기와 돼지고기, 쇠고기, 양고기에 이어 닭발과 등뼈, 각종 부산물까지 영국의 여느 정육 코너와는 사뭇 다른 진열 풍경에 엄마가 흠뻑 빠져 있었다.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게 뭐냐, 그건 왜?, 여긴 뭐라고 적혀 있냐? 등의 질문을 엄마가 쏟아내는 통에 이에 답변하느라 한창 정신이 없던 중 누군가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가 붙어 서있던 진열대 반대편에서 고기를 썰던 아까 그 남자가 우리 모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대놓고 보는 건 아니지만 우리 쪽으로 애매하게 시선을 향하되 뭔가 석연찮아하는 표정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말은 해야겠다 싶은데 그렇다고 면전에서 지적하기는 곤란하다는 표정 말이다.


사실, 이런 분석은 이날 겪은 일을 하나씩 되짚어 보다가 내린 결론일 뿐, 당시만 해도 나는 왜 저러나 하는 의문만 살짝 가질 뿐이었다. 우리가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여기는 건가 싶기도 했다. 


엄마는 계속 정육 코너에 머물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직원의 눈초리가 따가워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정육 코너 직원의 눈초리를 피해 자리를 옮긴 곳은, 크고 작은 소쿠리와 밥솥, 주걱, 수저, 그릇, 찻잔 세트가 즐비한 잡화 코너였다. 개인적으로는, 단조로운 고기 덩어리보다는 알록달록한 색상과 앙증맞은 디자인까지 갖춘 이곳 상품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이 잡화 코너에서마저 타인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손님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진열대 뒤쪽 공간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직원이 우리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한창 작업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 자연스레 돌아본 행위겠지만, 그의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 수준을 벗어날 정도로 길게 우리에게 머물고 있었다.  


사지도 않을 물건을 두고 구경만 하며 시간을 끌다니 민폐라 할 수도 있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손님이 뜸한 시간대였다. 우리 모녀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니.


이미 사야 할 식료품은 수레에 모두 담아 둔 상태요, 더 이상 주변의 눈치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오늘 구경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결심하고 수레를 끌고 계산대로 향했다.


하... 

이런... 

도대체 무슨 일이지? 


곳에서도 의혹의 눈길은 이어졌다. 


우리가 고른 물건을 하나씩 계산대에 올려놓다가 눈이 마주친 직원에게 인사를 했더니 상대가 인사를 받아주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뭔가 석연찮다는 표정이요 말을 꺼내려하다가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눈길이 나한테인지 엄마한테인지도 모를 일이고, 얼굴이 아닌 그 아래 어딘가를 향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들 왜 이러지? 이날 상점에서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해답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던 내 의문은 계산을 마치고 봉투에 담긴 식료품을 하나씩 차에 옮겨 실은 뒤 운전석에 앉으려 하던 찰나에 풀렸다.



"저기요... 저... 잠시... 잠시만요!"


아까 계산대에 앉아 우리를 맞아주던 직원이 어느새 밖으로 나와 이렇게 외쳤다. 


뭔가 다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불러 세우긴 했는데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리 모녀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어색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상점에서 벌어진 일을 한 장면씩 내 머릿속에 떠올리자 의문의 실마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상점 내부를 돌아다닐 때만 해도 두 모녀가 꼭 붙어 있으니 우리에게 쏟아지던 그 많은 의혹의 눈길이, 둘 중 누구에게 향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를 타기 위해 두 사람이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으로 다가 가면서 서로 떨어지고 보니, 직원의 시선이 엄마로 더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엄마의 아랫배 쪽으로 말이다. 



"얼라가 이 추븐 날 꽁꽁 얼먼 우짜노!"


엄마는, 생후 한 달도 안 된 손자, 즉 내 아들을, 외투 속에다 넣고 다녔다. 앞으로 매는 포대기를 걸친 상태에서 그 안에 아기를 넣고 그 위에 외투를 둘러싼 채 말이다. 새끼를 주머니에 넣은 캥거루가 외투를 걸친 모양새다. 


지금 생각하면 두꺼운 외투 속에 갇힌 아기가 제대로 호흡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걱정할 만도 한데, 엄마의 '얼어 죽는다'는 논리에 넘어갈 정도로 정말 춥긴 추웠다. 내 아들이 안전했느냐는 - 사실 안전했지만 - 별개 문제고, 내 엄마가 품속에 아기를 넣고 다니는 사실을 주변 사람이 알 리가 없다.  


운동을 꾸준히 한 덕택에 엄마의 몸은 군살이 거의 없었다. 날씬한 중년 여성이 배 부위만 어색하게 볼록 나와 있으니 누가 봐도 의아해하지 않겠나. 젊은 여성이라면 임산부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50대 중반의 나이라면 의심할 만하다. 그것도 상점에서는 말이다.


직원이 우리를 불러 세워 놓고도 침묵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이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웃음을 터뜨리며 엄마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고는 외투를 열어 직원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그렇다고 중국어도 아닌 그 어떤 방식으로 엄마만의 의사 표현이 진행되었다. 영어를 전혀 못하면서도 혼자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넘게 걸려 영국까지 와서는 입국 심사를 통과한 분이다. 뒤늦은 내 해명에 엄마는 활짝 웃으며 외투 지퍼를 펼쳐 보였다.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손자를 보여주고는 자신은 아무것도 훔쳤다고 손짓발짓으로 직원과 소통하며 말이다.


마실 나온 사람처럼 여유 있게 상점을 돌아보며 수다를 떠는 두 여자가 뭔가를 훔쳤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은가. 그럼에도, 배만 볼록 튀어나온 중년 여성의 수상한 몸 상태를 두고 누군가는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 뻔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엄마는 상점에 들어설 때마다 지퍼를 열어 손자의 존재를 내보인 상태로 돌아다녔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타국에 와서 도둑 누명을 쓰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Tara Clar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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