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다.
영국에 오자마자 한동안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시청하던 시절이다. 영국 영어에 익숙해지는 지름길이다 싶어 열심히 챙겨보려 했으나 쉽사리 빠져들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전개 방식에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편이고, 꾸준히 챙겨보지 않으면 흐름이 끊긴다는 점도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영국의 시청자도 피해 갈 수 없는 막장 드라마 요소 또한 내가 드라마 감상을 꺼리게 만들었다. 출생의 비밀, 치정, 복수, 살인까지 영국 드라마에도 나올 건 다 나온다. 방송사들 사이에 시청률 경쟁이 극도로 치열해지는 크리스마스 시기가 되면 막장 요소 하나는 반드시 나올 것임을 대놓고 예고하며 드라마 흥행 끌어올리기에 안간힘을 쓸 정도다.
한국의 추석이나 설 명절처럼 가족과 친지가 오랜만에 모이는 연말에 다 같이 막장 드라마나 보라고?
이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 관심사는 영국의 시트콤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시트콤은 드라마보다 방영 시간이 짧고 매회 별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방식이다. 전체 줄거리 연결과 등장인물 간 복잡 미묘한 관계에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내용 이해가 쉽고 집중도 잘 된다. 무엇보다 가슴 졸이거나 분노, 슬픔, 허탈에 빠질 일 없이 시종일관 유쾌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행여 일반 드라마에서처럼 막장 요소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코미디를 현실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디 이뿐이랴. 우울하거나 몸 상태가 안 좋다 싶은 날이면, 만사 제쳐두고 따뜻한 차와 함께 TV를 켜놓고 시트콤을 연이어 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나만의 치료법이다. 막막함과 고달픔의 연속이던 해외살이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도 좋았다.
스트레스 해소와 영어공부, 영국 문화 익히기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영국의 시트콤, 특히 내가 사랑한 영국 시트콤을 이 자리에 소개할까 한다.
영국의 시트콤을 감상하려면 여느 해외 방송과 마찬가지로 블루레이나 DVD를 구매하거나 스트리밍 서비스, 유튜브를 이용하면 된다. 영국에 거주하는 이에 한해, 방송사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다시 보기가 가능한 프로그램도 있다.
나의 TV 시청 패턴은 매년 변화를 거듭해 왔다. 현재는 가족 모두 볼 수 있는 내용과 아들의 한글 공부에 흥미를 불러일으킬 작품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곳에 소개할 작품은, 대부분 영국 정착 초창기 시절에 내가 자주 시청하던 작품이라 방영 시기가 꽤 지났다. 반면, 영국의 최신 시트콤 트렌드는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보면 촌스러운 장면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수많은 영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고 여전히 재미있다. 대스타가 된 배우의 신인 시절을 엿볼 수도 있다.
주의: 대부분 15세 이상 관람가로, 어린 자녀가 시청하기에 부적절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영국에서 본 시트콤 중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내가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될 무렵부터 TV에서 방영하던 것으로, 본방 사수하고 다시 보기로 또 본 작품이다. 영국 시트콤에 대한 주제가 나올 때마다 남편과 나의 의견이 서로 엇갈릴 때가 있지만, 이 작품만큼은 둘 다 최고라 인정한다.
영국의 드라마와 코미디가 대체로 배경이 암울하고 칙칙한 편인데 이 작품은 몽환적인 분위기다. 병원을 무대로 의사와 주변 인물들 사이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국의 중산층 가정과 이들이 쓰는 영어를 엿볼 수 있는 시트콤이다.
중년 부부와 성인 자녀가 매주 금요일마다 집에 모여 식사를 하는 광경이 주요 내용이다. 장소나 대화 주제가 단조로울 듯한 설정임에도 상당히 흥미롭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른 작품에 비해 비속어나 욕설, 폭력이 덜 나오는 편이라 영어 듣기가 비교적 쉽다.
책으로 유명한 작품을 TV 방송으로 제작한 것이다.
영국에서 겪은 문화 충격이 한둘이 아니지만, 제목부터 Horrible Histories인 방송은 충격 그 자체다. 역사를 대하는 영국인의 태도 또한 충격이다.
침략국의 여유라고 해야 하나...
다른 유럽 강국과 함께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절 영국이 저지른 잔혹하고 비열한 행위는 물론 왕과 귀족이 행하던 양민 약탈, 억압, 학살까지 코미디로 꾸며졌다. 끔찍하고 잔인한 역사지만,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감사하고 기억하라는 뜻에서?
영국인의 역사관은 생뚱맞다 싶지만, 길고 지루하게만 다가오는 역사적 사실을 짧은 영상으로 익히는 장점은 있다. PG 등급이요, 교육 자료로 활용되는 방송이라 영어가 다른 작품에 비해 쉽다.
포스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자리에 소개한 시트콤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1995 - 1998).
3명의 천주교 신부와 이들을 보살피는 가사도우미가 주인공이다. 독실한 신자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종교와 상관없이 순수 코미디로 생각하고 보면 재미있다.
신부님이 욕을 하고 술주정에 폭력, 사기까지 속세의 나쁜 짓은 다하고 다닌다. 영국에서는 물론이고 이 작품의 촬영지인 아일랜드에서 더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배우와 작가도 아일랜드 출신이다.
주연 배우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시즌 3으로 끝이 나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국에서 내가 가장 먼저 본 시트콤이요, 영국 시트콤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영국판 <프렌즈>라는 평이 있다. 방영이 시작된 시기도 그렇고 남녀 구성원 숫자까지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하지만, 방송을 끝까지 보면서 미국의 프렌즈를 떠올린 적은 없다. 미국 드라마와는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청 가능한 연령도 다르다.
영국 청춘 남녀의 고민과 대화를 유쾌하게 엿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영국 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트콤이다.
실제 촬영지는 남아공이라고 한다. 매 순간 숨 막히는 전투와 위험천만의 작전이 펼쳐지는 상황이 코미디로 묘사 가능한지 의문이지만, 인간의 삶 그 어떤 순간에도 웃음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작품이다.
당장, 사진 속 배우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날 정도로 재미난 기억을 남긴 작품이다. 난 군대도 안 다녀왔고 전투 용어도 잘 모름에도 흥미롭게 봤다. 다만, 제목이 평범하지 않은 탓에, 이를 기억해 내느라 애를 먹었을 뿐이다.
추천 작품 중 유일하게 라디오 방송이다.
라디오로는 주로 음악이나 뉴스만 듣다가, 우연히 뉴스가 끝난 뒤 이어지는 방송을 듣고 푹 빠진 작품이다. 작은 항공사에 소속된 직원과 가족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사건 사고가 주요 내용이다. 오디오북으로 시리즈가 나와 있다.
등장 배우 중 눈과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바로 베네딕트 컴버배치.
이 시트콤 제목으로 동영상을 검색하면 배우들이 공개 방송 현장에서 작품을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세계적인 스타 대열에 오르기 전이라, 당시 광경을 촬영하던 관객의 카메라는 주연급 배우만 주로 비추고 있다. 이때 구석에 얌전하게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귀엽고 앳된 얼굴의 컴버배치를 잠시 잠깐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외에도 재미있게 본 시트콤이 더 있다. 정리하고 보니, 영국에서 정말 시트콤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Gavin & Stacey
The IT Crowd
Outnumbered
Cuckoo
The Vicar of Dibley
Miranda
Come Fly with Me
Not Going Out
The Inbetweeners
↑ 세월이 지난 작품은 물론 따끈한 신상까지 무료로 볼 수 있는 웹사이트다. 무료이니 방송 도중 뜨는 광고 정도는 거슬리더라도 참아주자.
영국의 철 지난 방송을 두고두고 보기 좋다. 시트콤은 물론 드라마와 예능, 스포츠,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아쉽게도 영국 외의 국가에서는 이용이 불가능하다.
↑ 앞서 소개한 Channel 4처럼 TV 방송을 다시 볼 수 있는 웹사이트다. 이 또한 영국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보기 가능한 시기도 한정되어 있다. Channel 4에 비해, 볼 수 있는 시기는 한정되어 있지만, 영국의 공영 방송사답게 유익하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으니 활용해 볼 가치가 있다.
↑ 영국의 방송 채널인 ITV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로 방영된 TV 프로그램의 다시 보기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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