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A가 꺼낸 말이다.
중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시에서 개최하는 음악회에 피아노 연주자로 참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음악회라니 그것도 성인 오케스트라 단원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협주곡 연주자로 초청되었다니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다 싶어 감탄도 하고 휴대폰으로 찍은 연주 장면도 진지하게 들여다봤다.
음악에만 재능 있는 아이가 아니라 운동과 미술 실력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학교 성적까지 우수한, 말 그대로 엄친딸이다. 어디 그뿐이랴. 글짓기도 잘하여 상도 받았다고 하니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점점 앉아있기가 거북해졌다.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이나 보자고 불러들인 자리에서 자기 딸 근황만 일방적으로 들려주고 있으니.
이날만의 일도 아니다. A의 자식 자랑은 이미 숱하게 들어온 상태다. 정작 당사자인 지영이는, 흥에 겨워 쏟아내는 부모의 말을 곁에서 듣고 있으면서도 자랑스러워하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토록 딸 자랑을 길게 늘어놓는 자리에는 우리 아들도 있었건만 그런 사실에는 A가 전혀 관심 없는 듯하였다. 어쩌다 우리 가족 중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 싶으면 A는 그저 우리가 무슨 말이든 빨리 끝내기만 기다리듯 무표정하게 지켜보다 곧바로 대화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동안 남편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진행사항도 들려주고 아이 키우는 부모끼리 통하는 수다도 떨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갑갑하지만 입을 다물고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라 A의 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이야기할 사례가 드물긴 했다. 물론, 이건 자녀의 성공 사례만이 유일한 대화 주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이날 화제의 중심이 된 지영이도 초등학생일 때는 A의 자랑 코스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대신, 중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던 지영의 언니와 오빠가 자랑 코스에 등장했기에, 이래저래 우리 가족은 A와 만나기만 하면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입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자식 잘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냐 만은 일방적으로 대화를 몰아가며 자식 이야기에 몰두하는 이와의 만남은 피곤하다. 비단, A에게서만 겪은 일은 아니다.
처음 인사를 나눈 뒤 두 시간 여 동안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말문이 막힐 때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우리 딸이 공부를 잘해서...'라는 말을 반복하며 애매한 상황을 얼버무리는 사람도 있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 B의 말이다.
이틀 전 행사가 열리던 날 같은 테이블에서 처음 만나 식사를 한 사람인데 케임브리지에 산다고 했다.
수백여 명의 참가자가 몰려들면서 음식 배분에 차질이 생겼는지 두 시간여 가량 식사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 바람에 뜻하지 않게 B의 가족과 길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긴 했지만 오히려 서먹한 분위기에서도 서로가 하는 일과 가족에 대해 알아가는 좋은 기회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행사가 열렸던 도시를 마지막으로 구경하자고 나선 길이었는데, 이날 또다시 이들과 마주친 셈이다.
B가 신기하다는 듯 또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틀 전 그토록 길게 이야기 나누면서도 아들의 대학 입학에 대해서는 내가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리 가족이 자리를 뜨고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이에게서 들었으리라.
다른 대학도 아닌 자기가 사는 지역에 있는 학교로 아들이 입학한다는데 애 엄마가 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의아해 할 수도 있다.
'어머, 케임브리지에 사신다고요? 울 아들이 이번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합격했는데 종종 뵐 수 있겠네요' 이런 말을 꺼내며 아는 척하는 것이 오히려 더 당연하다 싶었을지 모른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드니즈의 질문이다.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티는 내지 않고 옥스퍼드가 아니라 케임브리지라고 슬며시 정정해 줬다. 내 아들과 같은 대학준비반에 다니는 드니즈의 아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영국에서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나, 둘 다 가기 힘든 대학이긴 매한가지니 이름을 혼동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저기, 김사장네 큰 딸이 고려대 간다고 그랬지?"
"아니, 고려대가 아니라 연세대라니까요."
오죽하면, '옥스브리지 (Oxbridge)'라는 말로 두 대학을 합쳐 부르겠는가.
10여 년간 모임을 이어오면서 개인 사정으로 인해 중간에 멤버가 교체되긴 했지만 대부분 한 지역에 정착해 사는 친구들끼리 꾸준히 만남을 가져왔다. 모임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주제도 없이 매번 편안한 장소에 모여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정도가 전부다. 별 주제도 내용도 없이 모이기는 하지만, 한두 명을 제외하면 멤버 모두가 각기 다른 국가 출신이라는 점만으로도 모임이 가치를 발휘한다.
각자의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가정을 꾸려서 다들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두고 있다. 시기별로 매번 다른 양상이긴 하지만 자식 키우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오곤 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자녀의 학교 졸업이 주제로 나왔다. 3명의 아이는 중등학교를, 6명의 아이는 대학준비반 졸업을 앞두고 있기에 이렇게 흘러간 것 같다. 그중 한 명이 내 아들이다.
평소에도 먼저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인데, 이날만큼은 '아들 대학은 어떻게 되었어?'라고 곧바로 질문이 나왔음에도 망설여졌다. 내 아들을 포함해 같은 경로를 밟고 있던 6명의 아이들 중 3명만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한 명은 대학준비반을 중도 포기했고 다른 한 명은 취업 과정을, 나머지 한 명은 재수를 선택했다.
입시에 실패했다고 해서 혹은 대학과는 다른 경로를 밟는다고 해서 인생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다만, 아이가 대학에 가지 않겠다 선포한 뒤 부모와 갈등을 빚었던 사정을 직간접적으로 들어온 지라 이런 분위기에서 내 아들의 대학을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어쨌든 말해놓고 보니 다들 놀라는 눈치다. 생각지도 못한 대학 이름이 내 입에서 튀어나옴에 대한 단순한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평소 아들 자랑을 전혀 하지 않던 사람에게서 나온 갑작스러운 정보라는 점에 더 놀란 눈치다.
나는, 상대가 묻기 전에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 아들의 학교 성적이나 대외 활동은 물론 최근 있었던 대학 합격까지 분명 자랑거리가 될만한 내용임에도 말이다. 묻지도 않는데 자식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는 건 대화 분위기에도 어긋나고 상대의 관심사와도 맞지 않다는 믿음에서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A처럼 자식 자랑을 일방적으로 하는 사람과의 만남에 지쳐서 형성된 태도일 수도 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아들이 대학 간 이야기, 학교에서의 활약상까지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고 싶다. 하지만, 상대의 관심사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떠드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내 일도 아닌, 남의 아이 이야기에 그토록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그동안 영국에 살며 겪은 일을 시기별, 주제별로 구분하여 하나씩 글로 털어놓다 보니 육아와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아들이 대학 가는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가 아닌 궁금해하는 이에게만 털어놓으려 한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다.
그런데, 명문 대학에 입학하는 이야기가 나의 글 중심은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수많은 부모가 책이나 방송 인터뷰로 내놓았으니.
공부 그만하고 자러 갈 시간이라고 일러줘야 할 정도로 독서와 문제 풀이에 재미를 붙이는 아들 덕택에 스트레스 덜 받으며 고3 부모로 지낸 이야기다. 물론, 그렇다고 사춘기 아이와 부모 사이에 전혀 갈등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일을 비교적 순탄하게 보낼 수 있었던 배경도 이야기해볼까 한다. 또한, 영국에서 학교 다니는, 어쩌면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가 될만한 이야기도 하련다.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물론 이니셜까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각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Daniel K Cheun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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