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수 매트???
온수 매트는 내가 들어봤다만, 단수 매트는 뭐란 말인가.
효도 상품으로 혹은 명절 선물, 자취 필수품 등의 명목으로 각종 전기장판이 인기를 끄는 한국이라면 몰라도 여긴 영국 아닌가. 벽에 달린 히터 하나만 믿고 겨울을 버티다 이걸로 부족하다 싶으면 뜨거운 물을 담아 쓰는 핫팩으로 만족하는 나라에서 말이다.
그것도 아들의 학교에서 했다고?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다. 한국어가 서툰 아들에게 '단수'라는 한자어는 꽤 어려우니 아무래도 학교에서 들은 영어 단어를 그대로 옮긴 모양이다. 그럼 '단수'가 뭐지?
"선생님이 교실 바닥에 매트 깔아주고요, 친구들이 거기 올라가 음악이 나올 때마다 춤추는 거예요."
하하...
단수 매트가 아니라 '단스 매트'였구나.
아들이 학교에서 썼다고 하는 매트는 한국에서도 판매되는 제품으로 DDR 매트, 댄스 매트, 게임 매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나는 이 중에서 DDR 매트로만 알고 있었다.
아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영국식 발음도 간혹 혼란을 주는 요소다.
단순히 미국식 발음 '댄스'에서 '단스'로 바뀌는 정도가 아닌 길게 늘여서 '다안스'에 가깝게 발음한다. 말 한마디 건네는 모습으로도 상대가 지적으로 보일 때가 있는데, 영국인이 'Dance'를 발음할 때 특히 그렇다.
영어가 섞인 한국어 문장 또한 이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집에서 대화 나눌 때 최대한 한국어를 쓰도록 아들에게 권장하지만, 학교에서 경험한 일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한국어로 옮기기 힘든 단어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영어 단어를 문장에 그대로 이어 붙이곤 했다.
아이가 직접 땅을 파서 무언가 심고 캐는 행위는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빠지지 않는 수업이다. 이를 설명하려다 한국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단어가 나오자 아들이 영어로 대체한 셈이다.
'단스 매트'라는 단어도 아들이 하루 일과를 들려줄 때 등장한 것이다. 수업을 마친 뒤 나와 함께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었다.
초등학생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으면 2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 반복되는 시간 동안 두 모자가 손을 잡고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등교하는 오전 시간에는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나 눈에 띄는 주변 사물, 동물에 대해 두서없이 각자가 말을 꺼내는 편이었다. 반면, 오후에는 학교에서 겪은 일을 아들이 일방적으로 전해 주는 시간이었다.
이날처럼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순간을 한시라도 빨리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아들이 '엄마요, 오늘 학교에서요...'라며 내가 묻기도 전에 술술 읊어내는 날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날도 있었다.
친구들과 크게 웃고 떠들다가 매트를 차지하려 서로 떠밀기까지 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그런 떠들썩한 행사가 매일 있으면 좋으련만 학교라는 환경이 늘 그럴 수만은 없지 않은가. 교실에 앉아 선생님 말씀을 듣다가 점심을 먹은 뒤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또 오후 수업에 참여하고... 이런 변함없는 일상의 연속이 대부분이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단순해 보이는 일상이라도 나에게는 흥미롭게 들렸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학교 풍경이 많아서다.
아들과 나 사이에는 30년이라는 커다란 시간 차가 존재하는 데다 두 사람이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국가도 다르다. 같은 지역 같은 학교라 하더라도, 나와 내 친구가 학생으로 다니던 학교와 그 자녀가 다니는 학교는 다르다.
그래서, 아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 좀 들려달라고 부추기며 대화를 시도해 왔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맨날 같은 학교에서 같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집에 오는 이야기가 왜 궁금한지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길고 무료한 등하교 시간을 알차게 채워보고자 또 아들의 한국어 실력도 키워보고자 시작한 대화는 그 자체로도 만족스럽지만,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성과가 있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 채로 아들이 나타났다.
남편의 학업과 취업으로 인해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니 아들은 초등학교를 두 번이나 옮겨야 했다. 그럴 때마다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느라 힘들어했지만, 다행히 새 학교에 금방 적응했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보다. 아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 모두가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고심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 다른 성장 환경과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아들과의 대화는 미궁에 빠지기 십상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엄마가 늘 관심을 가져 준다는 사실에 아들이 자존감을 키우는 계기가 된 듯하다. 별 변화도 재미도 없는 학교 생활, 공부에 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어렴풋이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내 발등을 내가 찍는 기회도...
'프랙션'이 뭐냐고 내가 물었더니 아들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fraction
* 분수
수학을 한국어로만 배웠기에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일 뿐, 분수 개념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여기에다 '엄마가 학교 다닐 때 수학 쫌 했거든'이라며 자화자찬까지 곁들였건만, 아들은 오히려 이때부터 내 수학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엄마를 시험에 들려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치른 수학경시대회 문제지를 가져오더니 내게 풀어보라고 했다. 이과 출신인 아빠에게는 안 주면서 엄마에게만, 도대체 왜?
중학교 1학년 나이에 시작된 아들의 시험 고문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 이어졌다. 아마, 내가 순순히 받아줬다면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수학 문제와 씨름했을지 모른다.
억지이긴 하지만 나도 한계를 느껴서 한 말이다.
내 수학 실력을 의심하는 아들 덕택에 인수분해도 다시 공부하고 잊었던 수학 공식도 찾아보느라 몇십 년 동안 쓰지 않던 뇌의 한쪽 구석이 활기를 찾은 듯하다. 하지만, 문과 출신에게 이과 수학에 도전하라고 강요하는 건 무리이지 않은가. 내 나이 마흔 넘어서?
아들이 점점 수학에 재능을 보이다가 결국 대학에서 전공과목으로 정하게 된 것도 엄마의 수학 실력을 검증하려던 집념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아들이 중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두 모자의 등하교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아들과의 대화 자체가 중단된 건 아니다. 가족 모두 저녁 식사를 할 때면 매번 공식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아들의 하루 일과를 듣는 시간을 가지기에.
이젠 더 이상 아들의 손을 잡고 학교를 오갈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 예전 아들과 걷던 거리를 지금은 나 혼자 걷고 있다. 하루 한 시간 걷기를 실천하면서부터다.
매일 걷다 보면, 예전 나와 아들이 함께 지났던 그 길을 따라 당시 내 또래로 보이는 부모가, 또 내 아들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조그마한 몸짓으로 나를 따라다니며 쫑알대던 귀여운 아들과의 추억이 떠올라 혼자 미소 짓기도 하지만 약간 우려되는 면도 있다.
아이와 걷는 부모 중 대다수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평소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편이라 길을 걸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건 고사하고 전화 통화도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걷는 도중 휴대폰에 집중하는 이들의 행동이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더군다나 아이와 함께 다니지 않는가.
이 소중한 시간에 아이에게 더 관심을 쏟아주고 아이가 안전하게 길을 건너도록 교육하는 일에 집중하면 어떨까?
커버 이미지: Photo by Limor Zellermayer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