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서양식 인사 그리고 수염

by 정숙진

"데이브, 오랜만이네."


시내 도서관에 들렀다가 집으로 향하는 길이다.


온 가족이 읽었던 책을 한꺼번에 반납하고 새로 읽을 책을 큰 가방에 챙겨 넣은 뒤 도서관에서 나오는데,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곳 시내를 끼고 우리 가족은 서쪽 끝, 이 친구 가족은 동쪽 끝에 사는 통에, 이렇게 길에서도 만나고 단체 모임, 헬스장에서도 마주치던 친구다.


서로 반갑게 인사 나누고 가족 안부도 묻는데, 데이브가 나를 보며 쭈뼛쭈뼛했다. 내게로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하다가 망설이는 것 같다. 뭘 하려는지 아는 나도 망설였다.


한동안 내가 데이브의 이름을 착각해 앨런이라 불러댄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 주고,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던 친구다. 그의 아내를 통해 데이브의 이름을 제대로 전해 듣고는,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냐고 그에게 원망하는 시늉도 하고 장난도 쳤다. 이 정도 사이의 남녀라면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서로 볼에 대고 뽀뽀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회를 안 주고 있는 셈이다.

한국인 유부녀가 외간 남자에게 뽀뽀받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가 아니다.


데이브는 나보다 키가 작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그다지 작아 보이지 않는데 내 옆에 서니 내가 아래로 한참 내려다봐야 할 것 같았다. 이래서 남자 선배들이 내 옆에 서는 걸 극도로 싫어했구나, 싶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남자가 깡충 뛰어 내게 입술을 갖다 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초등학생 대하듯 무릎을 굽혀 그의 키에 맞춰야 하나?


어떻게 해야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한국에도 뽀뽀 문화가 있다면 내 성격을 잘 아는 남자들은 이런 상황에 '멀대 같은 가스나야, 뻣뻣하게 있지 말고 좀 수그리'라고 외쳤을지 모른다.


이날 데이브와의 인사는 그렇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끝이 났다. 아무래도 키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색함을 극복할 정도로 우리 둘은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나 보다.




고국을 떠나 사는 세월이 길다 보니, 한국 보다 영국 문화가 내게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반면, '저건 뭐지?'하는 의혹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한국 문화를 고수할 때도 있다. 나의 '다름'에 대해 누가 물어온다면 '한국에서는 이렇게 해요' 혹은 '영국에서는 이렇게 해요'라고 받아 칠 궁색한 변명도 준비해 두고 말이다.


어떤 문화든 내게 편한 대로 해석하여 내 입맛대로 살아온 이방인 생활이면서도, 내가 유독 적응하지 못하는 서양 문화가 있다.


바로 인사법이다.


'헬로'나 '하이'로 시작하는 언어적 인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인사말이다. 앞서 언급한 데이브와의 일화처럼 서양식 인사에서 뽀뽀는 빼놓을 수 없다. *


*현재 코로나로 인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되는 영국에서 뽀뽀 인사는 물론 악수조차 금지된 상태다.



여자 대 여자, 테니스 선수끼리 나누는 우정의 뽀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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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출신 페트라 크비토바와 벨라루스 출신 빅토리아 아자렌카가 윔블던에서 만났을 때다.



남자 대 남자, 축구 선수끼리 나누는 기쁨의 뽀뽀

wqeoh97qwt131.jpg reddit.com


리버풀 FC 소속 조던 헨더슨과 아담 랄라나이다. 2019년도 챔피언스리그에서 팀이 우승하자 랄라나가 기쁨에 들떠 주장에게 뽀뽀하는 장면이다.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나누는 인사 뽀뽀

Does-Prince-Charles-Like-Kate-Middleton.jpg popsugar.co.uk


케이트 왕세손비와 찰스 왕세자의 모습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생존하던 시절).


왕실이 아니더라도 영국에는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위와 장모는 물론 가족끼리 뽀뽀로 인사하는 모습이 흔하다. 물론 서로 사이가 좋아야 한다.


서양인이라고 모두 뽀뽀로 인사하는 건 아니다. 상호 인정하는 친밀감이 있어야 한다. 나도 친구와의 만남에서 키 때문에 얼떨결에 뽀뽀를 거부하는 사람이 돼버린 것처럼, 뽀뽀가 흔한 인사법임에도 상대에게 뽀뽀하려다 어색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국가 정상들끼리의 어색한 뽀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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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만남이다. 총리가 되기 전, 외무 장관으로 지내면서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결례와 실수를 반복해 저지르고, 다른 EU 국가들이 말리는 브렉시트를 주도했던 보리스 존슨이다. 유럽 정상들과의 만남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끼리의 어긋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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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악수만 하려 했더니, 뽀뽀라뇨!


영국 노동당 국회의원인 해리엇 하먼과 같은 당 소속 에드 볼스의 어색한 만남이다. 정치 동지 사이에 악수만 하면 되겠지 했는데, 상대가 이렇게 입술을 내밀며 뽀뽀하려 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뽀뽀를 하려 하고 누구는 피하려 하고, 왜 이렇게 복잡하지?


따지고 보면, 서양식 인사만 복잡하다고 할 수 없다.


같은 한국인끼리도, 처음 만나는 사이에 하는 인사와 자주 보는 사이에 하는 인사,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인사가 다르지 않은가.


또한, 허물없는 사이에 하는 인사와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사이에 하는 인사도 구별된다.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는데 상대는 고개만 까딱할 때도 있다. 허리를 굽히는 대신 악수로 하는 인사도 있다.


멀리서 인사 나누는 장면만 보더라도 둘 사이의 관계와 이들 만남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니.


이런 다양한 한국식 몸 인사법을 외국인에게 단시간에 가르칠 수 있겠나?


아무래도 말보다 몸으로 익히는 문화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내게는 뽀뽀 인사가 특히 그렇다.




몸으로 익혀야 한다는 점 외에도 내가 서양식 인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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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남자들의 수염 때문이다.


사진 왼쪽부터 (괄호는 사진 출처)

1. 배우 제라드 버틀러 (britannica.com)

2. 콜드플레이의 리드 보컬 크리스 마틴 (wikipedia.org)

3. 전 축구 선수, 모델 데이비드 베컴 (cosmopolitan.com)


영국에는 정치인이나 기업체 임원 등 보수적인 성향의 직업군에 속한 이를 제외하고, 수염을 기르는 남성이 많다. 수염을 기른다고 모두가 위 사진 속 인물처럼 멋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보지 못하던 남성적 매력 때문에, 나는 한동안 '수염 기른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남편에게 수염을 길러보라 떼를 쓸 정도였으니. 어쨌건 떼를 썼더니 성공은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친구 생일 파티에 갔을 때다. 모인 남성 중 상당수가 수염을 기른 상태였다. 이미 안면을 익힌 이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당연하다는 듯 볼에 뽀뽀를 하는데...


아악....


밤송이를 볼에 갖다 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나는 순간 비명까지 질렀다.


상대가 얼마나 무안해했으려나. 갑작스러운 내 반응에 나 스스로도 놀라서 '내 피부가 민감해서 그랬노라' 변명도 하고 사과까지 했다.


초대 손님의 행렬은 이어지고 수염 뽀뽀도 끊이지 않자 더 이상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이날 내 볼은 오른쪽, 왼쪽 번갈아 가며 수난을 당했다. 서양식 인사 문화가 더 어색하게 다가온 날이다.


아시아인보다 피부가 더 연약해 보이는 서양 여자들은 그 많은 남자들의 뽀뽀를 어떻게 감당해 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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