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대화 도중 이렇게 제안했다.
캠핑카에 캠핑 장비까지 두루 갖춘 집이다. 나처럼 캠핑 초보는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영국 현지인이라 해도 될 정도로 정착 기간이 긴 A가 추천하는 곳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여행지 보다 숨은 명소를 찾아다니기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 맞는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A가 하자는 대로 따를 수는 없다.
영국에서 만난 한국인과 교류하면서 거절하기 힘들어도 어떻게든 거절해야만 했던 제안이 있다. 바로 야외에서 같이 밥 먹기다.
얼마나 바쁘게 산다고 밥 한 끼 먹자는 요청을 못 들어준단 말인가?
주변 사람과 밥 먹기는 숱하게 해 왔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열 번도 넘게 이사 다니며 집이 크든 작든 단칸방이든 매번 집들이를 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밥을 먹었다. 연휴를 기념하여 집에서 파티를 벌이거나 다른 사람의 집으로도 초대받아 갔다. 식당에 모여 함께 식사도 해왔다. 같이 밥 먹는 행위 자체는 불만이 없다.
내가 꺼리는 건 음식을 챙겨 밖에 나가서 먹는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차박이나 캠핑이 될 수도 있고 단순히 야외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도 있고 요리를 해 먹고 오는 방식도 포함된다. 각자가 보유한 장비와 경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제안이 들어온다.
대체로 영국에서의 체류 기간이 정해져 있거나 자녀들이 장성한 가정에서 이런 제안이 온다. 얼마 안 남은 기간 동안 영국에서의 추억을 최대한 많이 쌓으려 하기 때문이리라. 혹은, 어린 자녀가 없으니 음식을 장만해 야외로 나가는 일이 덜 번거로워서다. 우리처럼 영국에 오래 거주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가정은 상대적으로 더 부담으로 다가오는 일이다.
그런데, 단순히 준비가 부담스러워 이들과 야외에서 밥 먹는 일을 꺼리는 건 아니다.
B가 자신의 아내에게 한 말이다.
외국에서라도 일단 한국인끼리 모이면 장유유서가 적용된다. 참석자 중 최고 연장자인 B가 던진 이 한 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부남들의 엉덩이가 의자에 찰싹 고정되었다.
반면, 그 남편들 옆에 있던 아내들의 의자에는 전기 충격이라도 가했는지,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이 정도 충격에는 이미 단련된 내 엉덩이는 비교적 오래 버텼다.
이날 모임을 준비한 가정은 음식을 뷔페식으로 차려서 각자 챙겨 먹게 해 두었다. 하지만, 무슨 중대사라도 논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남자들 때문에 뷔페식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남자들은 자동으로 VIP 고객이 되고, 여자들은 서빙하는 직원이 되어야 했다.
소수에 해당하지만, B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목소리를 내면 모임 전체에 영향을 준다. 대체로 50-60대 이상에게서 볼 수 있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이런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있다.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이들의 아내는 남편의 가부장적 행동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면서 손님으로 온 여자들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일을 시킨다. 내게 앞치마까지 주면서 일을 시키던 한 여성은 내 굼뜬 손놀림에 짜증을 냈다. 꼼짝도 안 하는 남편 대신 내게 일 시키려 집으로 부르는 건가?
일부에 해당하지만, 이런 한국인들의 태도가 야외에 나간다고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실내에서야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그 순간만 견디면 되지만, 야외에 나가서까지 그런 굴욕적인 분위기에서 밥 먹고 싶지 않다.
또한 장소는 영국이지 않은가.
이민족들의 단체 모임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기 마련이다. 손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편과 이들에게 순종하는 아내의 행동을 전형적인 한국 부부의 모습인양 외부에 보이고 싶지 않다.
나는 '여행'과 '여행지에서 밥 먹기'는 별개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참여 인원이 많을수록 이걸 병행하기 어렵다고 본다.
술까지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목격한 바로는, 사람은 밥과 술이 몸에 들어가면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부모의 손에 따라 간 어른들의 계모임과 대학 시절 MT도 그렇고 직장 동료와의 친목회도 그렇다.
여행 첫날은 주변을 열심히 탐방하고 다니지만, 일단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다들 한 자리에 계속 눌러앉기 마련이다. 과음한 탓에 다음 날 숙취로 깨어나지 못하는 멤버도 속출한다.
그러면, 이날 일정은 자동으로 연기되거나 취소된다. 식사와 청소 당번도 바뀐다. 나처럼 술 못하는 멤버가 주로 먼저 깨어나 전날 음주가무의 현장부터 정리한다. 식사 당번도 자처한다. 그렇다고 큰 불만은 없다. 내게 억지로 술만 권하지 않는다면, 술 마시는 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청소든 식사든 도맡는 분위기가 싫지 않다.
다만, 더 이상 학창 시절 MT도 아니고 젊고 건강한 20대의 미혼 청춘남녀도 아닌데 눌러앉아 먹고 마시려면 집이 더 편하지 않은가? 굳이 여러 가족이 어울려 음식과 짐을 싸들고 먼 곳까지 운전해 갈 필요가 있는가?
여행과 밥, 술 하면 내게 떠오르는 아찔한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가까이 사는 친척들끼리 계곡으로 놀러 가자는 제안이 나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가 그 제안을 거절해야 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셨다. 가족은 전혀 안중에도 없으면서 늘 주변 눈치만 보고 타인에게만 인심을 펑펑 쓰던 분이다.
이런 아버지의 성향을 잘 아는 나로서는 친척 모임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친척 중에는 술에 취해 야외에서 추태를 부리는 분도 더러 있었다. 이 때문에 여행 끝무렵 어린 아이나 친척 아주머니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우리 가족만 빠지고, 계곡 모임을 다녀오던 친척 일행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고속도로에서 달리던 승합차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고 한다.
결과가 처참하다.
친척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주머니 한 분은 한쪽 팔을 잃으셨다. 사고 당시 운전을 맡았던 친척 아저씨는 음주 운전에 과속으로 구속되었다. 어린 시절이라 그 아저씨가 어떤 법적 처분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구류 상태에서 잠시 풀려난 모습만 봤을 뿐이다.
해외에서 생활하고 온 연예인의 경험담이다.
현지에서 알게 된 한인들과 주말마다 모임을 가지는데 매번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왔다고 한다. 모임이 점점 활성화되자 집집마다 요리 경쟁이 붙었다는 내용이다. 이 여성도 경쟁에 지지 않으려 전날 밤늦게까지 칼질을 하다가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 여성은 웃어넘기며 한 말이지만, 옆집에 방해가 될 정도로 늦은 시간까지 요리를 하면서도 모임을 이어가다니 내게는 충격이었다. 왜 해외에서 한국인끼리 먹는 걸로 경쟁하는가? 억지 경쟁까지 하며 모임을 이어갈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내가 영국에서 본 한국인에게도 이런 성향을 간혹 볼 수 있다. 요리 자체에 재미를 붙이기도 하고 살림 고수로 요리를 뚝딱 해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는 자리가 되면,
"몇 시간씩 저거 만드느라 손이 다 부르텄다."
"어제 고기 재운다고 한숨도 못 잤다."
"반나절이나 김밥 말고 써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다."
라며 하소연한다.
물론, 그만큼 정성이 들어간 음식임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말일 수도 있다.
즐겁게 담소를 나누어야 할 모임이 '누가 더 요리 잘하나?'처럼 경쟁의 장이 되거나 '누가 더 고생 많이 했나?' 한탄의 장이 된다면, 나는 가고 싶지 않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Toa Heftiba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