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려하던 일은, B의 아내가 영국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발생했다.
공항 입국 심사*에서 B의 아내가 받은 질문이다. 남편의 불법 거주 사실이 탄로 날까 두려웠는지 이 질문에 우리 집 주소를 댔다고 한다.
"이 주소가 남편이 사는 곳 맞습니까?"
매서운 눈으로 되물어보는 입국 심사관의 태도에 쫄아버린 B의 아내는 결국 친구 집이라고 실토했다.
함께 살 집도 마련하지 않고 가족을 부른 남편도 수상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영국에 온 아내는 더 수상하다. 불법 행위를 예상한 심사관은 이 여성의 비자란에 '취업 금지'라는 도장을 찍었다. 남의 집에서 공짜로 살며 유학생활을 하겠다는 허망한 계획을 세운 B 때문에 그의 아내는 입국 첫날부터 혹독한 심사를 치르고 취업 금지까지 당했다.
* B의 아내처럼, 배우자가 영국에 먼저 정착해 있는 경우 필수 서류만 갖추면 공항에서 심사를 거쳐 비자를 발급받는 일이 당시까지만 해도 가능했다. 이 때문에 지금처럼 큰 비용과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서류 미비나 의사소통 문제로 입국이 거절되는 사례도 있었다.
나도 이 심사를 받으며 상당히 긴장했다. 불법 요소도 없고 의사소통에 자신 있었음에도 그렇다. 항공편 구매를 도와주던 여행사 직원의 경고가 없었다면 더 당황했을지 모른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심사 분위기는 엄중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영국에 입국한 사람이 지레 겁먹고 자백할 수 있도록 최대한 무서운 얼굴과 목소리로 질문하라.'라는 내용이 심사관 업무 매뉴얼에 있었던 건 아닐까?
혹독한 입국 과정을 거치긴 했어도 B 가족의 삶은 이후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공짜 집에 살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이들의 만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성인 남녀가 싱글 혹은 커플로 거주하는 공동 주택에 어린 자녀까지 데려와 살면서 월세도 내지 않는 가족을 다른 거주자들이 곱게 볼 리 없다. 이들의 불법 거주 사실이 집주인의 귀에 들어가고 B의 가족은 곧바로 쫓겨났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영국에서 의료 혜택을 받고, 자녀의 학교 입학은 물론 각종 서비스 신청까지 하려면 집주소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주소란에 입력할 정보가 아니라 그 주소지에 거주한다는 증명 서류를 제출하는 조건에서 말이다. 집으로 배송되는 요금 고지서 등의 문서를 말한다.
집주인 몰래 불법으로 거주하는 B에게 그런 서류가 나올 리 없다.
B의 아내는 공항에서 자칫 입국 거절을 당할 수도 있었다.
자녀를 학교에 입학시키는 일도 어렵다.
병원 등록은 물론 인터넷 서비스 신청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B의 학생 신분은 어떻게 유지하려고?
하지만, 역시 공짜를 좋아하는 B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 가족 때문에 아내의 비자에 문제가 생기고, 집주인에게 밀고한 사람 때문에 잘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났다고 불평했다.
이 글에 등장하는 A와 B는 사실 동일 인물이다.
굳이 A와 B로 나눈 이유는, 둘 다 공짜 밝히는 행동이지만 파급 효과는 달라서다. A의 행동은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겪는 일이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B의 행동은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범위를 벗어나 결국 본인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영국에 산다는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학생과 직장인, 프리랜서, 임산부, 학부모 역할을 영국에서 두루 수행한 우리 가족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다. 쇼핑을 따라가거나 병원에서 통역을 해주고 집 구하기와 학교 등록을 도와주는 정도다. 그런데, 선의를 베푸는 우리 입장을 악용하려는 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부담스러운 부탁을 해오는 이가 있다.
B의 사례처럼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민감한 사항이라면 나는 거절한다. 어렵게 부탁해 오는 이의 요청을 처음부터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나는 영국에 정착하려는 이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거절하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거절할 일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평판이 나빠질까 두려워 거절하지 않으면 나 자신과 나의 가족, 주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부탁한 사람마저 곤란해진다.
어떻게 곤란해지냐고?
나도 알고 싶지는 않았다. '도와달라' 애원하는 이의 부탁에 내 일처럼 나섰다가 호되게 당했다. 나보다는, 남편이 주로 겪은 일이다. 영국에서의 주택 계약과 취업, 비자에 관해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이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려는 이의 청을 수락했다가 벌어진 일이다.
B 사건 후에도 나의 등짝 스매싱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Tengyart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