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끼리의 그 남자
당신도 이별을 해 보았을까요? 당신도 누군가를 나만큼이나, 아니 나 자신보다도 믿어본 적이 있나요?
저는 그랬었습니다.
나의 세계와 그사람의 세계를 혼동하고,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내 세상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저는 이별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다시는, 내 세계에 타인이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겠다 다짐했고 타인의 세계에 내 둥지를 틀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바보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믿어보겠다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동물이니까요.
나에게 반했다던 남자, 친구들과 찍은 사진속에서 나를 보고 이여자다 싶었다던 남자.
덩치가 크고, 눈이 크고, 웃을때 가지런한 치아가 다 보이고, 목소리가 굵고 무거웠던 남자.
저는 평소에 끼리끼리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제 친구의 오래된 남자친구는 친구들과 만날때 빙수카페에 가서
빙수시켜놓고 하루종일 수다를 떨고 온다더군요. 세상에, 그런남자가 진짜로 있다고? 그럼 그분 친구들도 다 끼리끼리네?
그래서 저는 만나보았습니다. 끼리끼리의 그 남자를요.
처음만난날이 생각납니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저는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싫어합니다. 더위를 먹어서 어릴적엔 얼음물에서 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제가 한여름에 처음 본 남자를 위해서 사람많은 지하철을 타고 홍대까지 갔더랬죠.
약속된 장소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기까지 그 남자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약간 벌어진 입과, 상기된 볼과, 줄줄 흐르던 땀과, 저를 보지 않고 있지만 충분히 저를 보고 있는 그 눈빛을요.
첫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남자 나에게 첫눈에 반했구나.라는걸요.
저는 너무 더워 오로지 더위 식히는 일에만 몰두 중이었어요.
음식이 나오고 배가 너무 고픈나머지 와구와구 음식을 먹었는데,
그날 먹었던 단호박샐러드가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주최자(?)들과 함께 한 식사가 끝나고 우리 둘은 골목에 아무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한참을 서로 떠들었죠. 아니 저만 주로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취미가 책읽기와 여행이라는 제 말에 본인도 책읽는걸 좋아한다며 웃었죠.
(추후에 주선자에게 “그새끼가 무슨 책이야ㅋㅋㅋㅋ”하는말을 들었지만요)
그렇게 한참을 어색함없이 떠들었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쉽게 떠들어대다니, 정말 저 답지 않았어요.
저를 오랜시간 알고 지낸 친구들이 봤더라면 아마 엄청 놀랐을 걸요?
저 완전 내성인, 낯가림의 끝판왕이었거든요.
잠깜의 침묵이 흐를때마다 저는 창을 바라보곤 했는데요,
사실은, 창 밖의 풍경을 본게 아니라 창문에 비친 그사람이 웃겨서 보고 있었어요.
힐끔힐끔 저를 훔쳐보고 있었거든요.
대놓고는 못쳐다보고 제가 다른곳을 보기만을 기다렸다는듯이 저를 쳐다보고,
아주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어요.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어쩌면 또 다시 멍청한 짓을 반복하겠구나. 저사람에게 내 둥지를 틀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사람은 참 우직하고, 정직한 반응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저에게 반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제가 무슨 말만하면 크게 웃어줬어요.
한참 서로를 바라보고 얘기를하고는 헤어졌어요.
지방에 살던 그는 처음 와본 서울을 오로지 나만 만나기위해 온 셈이었으니까요.
그날 밤, 그 남자에게 전화가 왔어요. 밤 낮 없이 한시도 쉬지 않고 연락하더군요.
저는 당시에 백수였는데 직장인이 저래도 되나? 싶었거든요.
저의 밥을 걱정하고, 더위를 걱정하고, 소소한 나의 일상을 모두 궁금해 하더라구요.
그리고 우리는 홍찻집에서 두번째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제 앞에서 고장나는 그가 웃겨서 오히려 더 과감해졌어요.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어깨에 기대보기도 하고, 괜히 웃어보기도 했죠.
요즘엔 이런걸 플러팅이라고 하던데, 사실 저는 그남자가 마음에 들었나봐요.
놀리는게 재밌었어요. 반응하는 하나하나가 날것의 것이었거든요.
손을 잡으니 부끄럽고 좋아서 고개숙여 웃다가도 제가 손을 빼려하면 힘주어 잡았거든요.
밤샘 근무를 하고 4시간을 운전해서 달려온 그는 3시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또 다시 내려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짓인데, 사랑에 미친 남자에게 그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그리고 세번째 만남.
지금은 사라진 스타벅스 2층에서 그남자는 조용히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좋은데, 당신도 좋다면 우리 앞으로 진지하게 만나볼래요?
그말을 들은 저는 왜인지 고개를 푹숙이고 얼굴을 감췄습니다.
세상에, 이런 가슴뛰는 고백이라니!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고 저는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이 훗날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을지 상상하지 못한 채로요.
그렇게 나약한 인간인 저는 다시 나의 세계의 누군가가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 수 있는 키를 주었고,
그 세계의 주인인 저는 그사람의 세계로 매일같이 출타했습니다. 주인없는 내 세계를 뒤로 한 채로요.
이것이 정답일지, 오답일지, 세모가 그어질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세계에 발 붙이고 있나요?
혹은, 타인의 세계에 둥지를 튼 채 주인없는 내 세계를 가여워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지금 사랑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