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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규 Jan 15. 2023

세상의 모든 셜리

1. 174 대 160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추민찬 그 자식에게 174표나 주다니 그게 말이 돼?”

 아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영의 말이 백번 옳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어떻게 추민찬에게 표를 줄 수 있지? 생각이 제대로 박힌 인간들이라면 그 자식이 한 짓을 알고도 투표용지에 동그라미를 표시할 수는 없다. 아니, 세상이 정말 제대로라면 그 녀석이 학생회장 후보로 나오는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아니 미친 게 확실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에 벌어졌는데 저녁노을은 숨 막힐 듯 아름답고 야자를 하는 학교 건물에 불 꺼진 교실이 하나도 없다니! 답답한 마음에 운동장에 나왔지만, 혜연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젠장! 

 “그래도 잘 싸웠어. 겨우 열네 표 차 밖에 안 났잖아.”

 민경이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혜연은 그 위로에 미소 지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174 대 160. 열 네 표 차이라고, 잘 싸운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혜연이 선거 기간 동안 추민찬 그 자식보다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어제 저녁 선거운동원들에게 한턱을 내지 말고 새벽까지 주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표를 부탁했다면 어땠을까? 174대 160이라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까?

 반 친구들은 모두 혜연에게 투표했을까? 그중의 절반이 넘는 녀석들이 “힘내라! 오혜연! 기호 2번! 오혜연!”을 외쳤지만 정작 투표장에서는 추민찬을 선택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가 자신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니! 정말 한심하다! 이건 겨우 열네 표 차로 진 게 아니다. 혜연의 낙천적인 성격 탓으로 열네 표나 더 얻지 못해 진 거다. 젠장! 반드시 이기겠다고 그 자식만큼은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혜연은 왈칵 눈물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적어도 친구들에게 엉엉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가자! 오늘도 내가 한턱 쏜다! 낙선 턱!”

 혜연이 온몸의 힘을 짜내서 큰소리쳤다. 어색함에 온몸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지만, 별수 없었다. 

 “아니야 이번엔 내가 낼게.”

 아영이 달려왔다. 구두쇠 아영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다른 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선 채 꼼짝을 안 하고 있다. 참 눈치도 빠른 녀석들…. 어색한 연기지만 좀 장단 좀 맞춰주지. 그때였다.

 “야, 오혜연!”

 운동장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혜연이에게 달려왔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녀석…. 이름이 준영이었던가? 가물가물하다. 그 녀석은 한바탕 운동한 뒤였는지 땀 범벅인 얼굴로 혜연을 바라보았다.

 “나…. 너 찍었다.”

 혜연은 한참 멍하니 그 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와! 서준영! 너 프러포즈하는 거냐?”

 준영을 뒤좇아 온 서너 명의 아이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거 아니야!”

 준영이가 그 녀석들에게 소리를 빽 지른 뒤 다시 혜연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번 투표에서 난 너 찍었어. 잊지 마.”

 준영이가 이 말을 하고는 들고 있던 공을 운동장을 향해 뻥 찼다. 이내 준영이와 다른 녀석들은 우르르 공을 쫓아 달려갔다. 

 “쟤 뭐야?”

 아영이가 눈을 흘겼다. 하지만 혜연은 눈이 번쩍 뜨였다. 준영의 뜬금없는 말 한마디가 혜연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것도 160명이나 된다고!’

 학생 중 174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추민찬을 지지했다는 것은 끔찍하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주민찬이 학생회장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며 출마한 혜연에게 표를 준 사람도 160명이 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난 너 찍었어. 잊지 마.”

 준영의 이 말이 혜연에게 위로가 되었다. 비록 선거에서는 졌지만, 혜연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준영이는 깨닫게 해주었다. 

 ‘고맙다. 준영아!’ 

 혜연은 준영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혜연은 자신이 받은 160표가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160명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 학교 174명의 학생이 추민찬을 지지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끔찍하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추민찬이 학생회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오혜연에게 표를 준 사람들이 160명이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160명의 사람…. 160명….”

학교 건물을 나오면서 혜연은 마치 주문처럼 계속 이 말을 되뇌었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졌고 오늘의 실패가 티끌처럼 보일만큼 저녁노을이 미치도록 붉고 아름다웠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다시 시작하자!’

 혜연은 노을을 펼쳐진 하늘을 보며 씩 웃었다.     <계속 일요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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