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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규 Jan 14. 2023

사립 명문 오행고

1. 1960년 서울. 오행동

“저리 안 꺼져!”

물벼락이 날아왔다. 아이는 물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피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이 흠뻑 젖었다. 입술로 들어오는 물에서 냄새가 났다. 걸레 빤 물이었을까? 가게 주인은 침까지 탁 뱉고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가게 주인의 옷자락에서 불 냄새가 났다. 조금 전까지 화로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의 처지에서 가게 주인의 사정까지 걱정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젖은 옷의 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이내 추위가 피부밑까지 파고들었다.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서글픈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아이에겐 이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얘, 얘, 이리 와 봐.”

 누군가의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보다 대 여섯 살은 위인 것 같이 보이는 소녀가 보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걸로 보아 가게에서 허드렛일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소녀의 입술 언저리는 부르터 있었고 단정히 모아서 뒤로 모은 머리카락엔 윤기가 없었다. 며칠은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소녀는 아이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거 먹어.”

 소녀가 아이에게 보리밥 한 덩이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꾸벅 인사를 했다.

 ”너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왔구나!“

 아이는 허겁지겁 밥 덩어리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아원 출신이야. 이 집주인은 성질머리가 사나워. 그러니까 얼쩡거려봐야 소용없어. 저기 뒷골목 구둣방에 가봐. 거기 할아버지는 가끔 미제 사탕도 공짜로 주시거든.”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금세 밥을 먹어치운 후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니?”

 “누나, 내일도 여기 일하러 나와?”

 “왜? 은혜라도 갚으려고? 나 여기서 먹고 자 고해. 그러니까 언제나 있지.”

 그때였다. 아이가 소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누나…. 내 말 잘 들어.”

 “얘, 얘가 왜 이래.”

 소녀가 놀란 눈으로 아이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누나, 당장 이 가게에서 나가야 해. 알겠지? 밤까지 있으면 절대 안 돼!”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소녀가 당황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가게 주인이 소녀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강하게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아이는 더 이상 소녀의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게로 들어갔다. 아이는 매우 슬픈 눈으로 소녀를 지켜보았다. 

 그날 밤 9시가 되었을 때였다. 다리 아래에서 잡을 청하던 아이는 사방에서 번지는 뜨거운 기운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온 동네가 밝게 빛났다. 멀리서 활활 타는 불기둥이 보였다. 소녀가 일하던 중국집은 이미 시뻘건 불기둥에 둘러싸여 있었고 불은 이미 주변에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소녀가 아이의 말을 들었을까? 아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 아이가 꿈에 본 내용은 이제껏 한 번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아마 불이 난 까닭은 아마 불 냄새를 온몸에 풍기던 그 주인 때문이었을 테지…. 아이는 그의 죽음엔 연민도 슬픔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리밥 덩어리를 주었던 소녀의 앙상한 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왜 내 눈에는 불행한 미래만 보이는 걸까? 바꿀 수도 있는 대신할 수도 없는 지독하게 슬픈 미래만….

 ”얘, 얘!“

 귀에 익은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소녀였다. 그은 얼굴이었지만 아무 곳도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정말…. 소녀의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를 와락 껴안았다. 다행이다. 아이는 그 상태로 한동안 소리를 내 울었다. 

 ”얘 나하고 같이 가자.“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그 손을 잡았다. 눈물범벅인 얼굴이었지만 아이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계속 - 토요일 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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