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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규 Jan 17. 2023

이야기 요괴와 나

<1>

“이제….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그가 말했다. 설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빛 머리카락 사이에 그의 두 눈이 보였다. 내 이야기? 설은 누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인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에게는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의 길고 긴 머리카락이 설을 감쌌다. 따뜻하다. 순간 피부 깊숙이 저장되어 있던 할머니의 따뜻한 체온이 떠올랐다. 그리고 할머니가 매일 밤 들려주시던 기이하고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들도 하나하나 피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아니다. 윤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야 하니까. 하찮고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이야기라도 괜찮을까? 그는 그 옛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자신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어줄까? 잠시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윤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 너는…. 이야기 요괴니까’

 윤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야기 요괴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지금 별이 가득하다.           


 어렸을 적 윤설의 기억은 대부분 할머니와의 기억이었다. 당연하다. 할머니와 설은 세 살 이후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설의 부모는 얼굴도 모르는 엄마와 1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한 아빠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설의 엄마이자 아빠였다.

 설에게 할머니는 인자하지도 엄격하지도 않았다. 조용하지만 근엄하진 않았고 설에게는 항상 미소를 잘 지으셨지만, 큰소리로 웃지는 않으셨다. 할머니는 마치 백자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조용히 버티고 있을 사람. 원래 있어야 할 여백처럼, 백자의 실루엣처럼 할머니는 설 옆에 언제나 함께했다. 설은 그런 할머니가 좋았다. 그리고 밤마다 듣는 할머니의 이야기들도 좋았다. 

 “설아, 이야기 들려줄까?”

 이 한마디에 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마다 마음은 뛸 듯이 기뻤지만, 굳이 표현하진 않았다. 하지만 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알아차렸다는 듯 할머니는 입을 열고 이야기를 조용히 꺼내셨다. 

 설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딘가 묘했다. 전래동화책에서 나왔던 선녀와 나무꾼이나 은혜 갚은 까치같이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요괴들이 나왔고 그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기이하고 슬펐다. 그래서 이야기가 막바지가 될 즈음 설은 여지없이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에게 들은 그 이야기들이 다음 날 아침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기이하고 슬픈 요괴 이야기…. 설이 기억나는 건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설은 할머니에게 지난밤 이야기를 다시 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마치 지나가는 기차의 멀어져 가는 기적소리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할머니의 이야기는 다시 꺼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매일 밤 시작되던 그 수만은 이야기는 밤마다 할머니와 설의 시골 방을 가득 채우고 아침이 되면 불빛을 깜박이는 아궁이의 불씨처럼 사그라져갔다. 

 하지만 설은 아쉽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면 하루가 간다. 멈추어 있을 것 같았던 외로운 시간도 이야기와 함께 사라진다. 그걸로 족하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무당으로 불렸지만, 누군가를 위해 점을 보진 않았다. 할머니는 매일 새벽 달빛을 담은 우물물을 그릇에 담고 기도를 드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쪽방 천정에 작은 종이 주머니가 하나가 걸려 있었다.

 설은 종이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늘 궁금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묻진 않았다. 그건 엄마의 행방 그리고 부모들이 왜 자신을 버렸는지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것과 같았다. 세상에는 일부러 밝히지 않아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설은 잘 알고 있었다. 대책 없이 밝혀진 진실 앞에 서면 감당할 수 있을까? 설은 두려웠다.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글씨가 쓰여 있는 종이 주머니는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독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쪽방에 걸린 수백 개의 종이 주머니들이 바라보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설은 할머니가 장에라도 가시는 날이면 쪽방에 누워 수백 개의 종이 주머니들을 바라보았다. 뭔가 친근하면서도 매혹스럽고 치명적인 그것들이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면 설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계속 -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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