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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할머니가 장에 가시는 날이었다. 설은 무언가에 끌리듯 쪽방을 찾았고 반듯하게 누워 종이 주머니들을 바라보았다. 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빛바랜 종이 주머니에서 풍기는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애가 좀 어두워요. 친구도 없고…. 부모 없이 할머니랑 살아서 그런가….”
선생님들의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날 대출한 책을 반납하러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설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열던 사서 선생님의 속 마음을 알 리 없었을 것이다.
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럽고 아픈 마음이 작은 방을 천천히 물들였다. 묘하게 한자가 쓰인 종이 주머니들이 설을 위로 해주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설의 눈이 스르르 감기던 그 순간, 어디선가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쌍한 것…. 그게 고집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여. 세상이 변했어. 너나 나나 쉴 때가 된 거여.”
‘할머니가 오셨어. 이제 일어나야 해.’
설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말에 무언가 웅얼거리는 답변이 뒤따라 들렸지만, 그 목소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네 녀석 고집은 여전하구나. 그래 좋다. 그럼 한가지 나하고 약속해라. 반드시 지키겠다고….”
그 순간 종이 주머니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설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할머니?”
하지만 쪽방에도 안방에도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할머니의 목소리였는데….
“따르릉!”
전화가 왔다. 1년에 한두 번 울릴까 말까 한 전화벨 소리가 매우 차갑고 낯설었다. 설은 그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하지만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정현 병원 응급실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설은 커다란 방안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 모습이 딱했던지 마을 사람 몇몇이 찾아와 먹을거리를 전달해 주었지만 설은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설은 이틀 동안 정신없이 잠만 잤다. 그러던 중 아빠가 돌아왔다.
“여기 집은 허물 거야. 펜션 업자들이 탐내던 곳인데 노인네 고집에 여태껏 이 모양으로 있었던 거지.”
아빠의 반응은 설의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애당초 아빠의 마음속에 설이 있을 공간은 없었다.
“너는…. 일단 고모 집에 있어…. 순영이 고모 너도 알지? 말을 이미 다 해 놨어. 여기 공사는 모레부터 시작될 거고….”
“할머니 유품….”
“그 노인네 유품이랄 게 뭐 있어? 다 오래되고 쓸모없는 것들 뿐이지…. 쪽방에 달린 주머니들은 다 뭔지…. 흉측해서 원.”
아빠의 말에 설은 급히 쪽방으로 건너갔다. 없다. 수백 개의 종이 주머니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제야 설은 앞마당에서 불타고 있는 할머니의 낡은 물건들에 눈이 갔다. 이미 수백 개의 종이 주머니는 하얗게 재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설은 할머니의 죽음이 실감 났다. 그리고 그 순간 장례식 내내 터지지 않은 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설은 할머니의 유품들과 종이 주머니가 다 탈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하얀 재로 사라지는 마지막 할머니의 흔적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설만의 애도 의식이었다. 불이 모두 꺼졌다.
“밥 좀 먹자. 집 안 정리하느라 아침도 못 먹었네.”
아빠는 툇마루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고는 무심히 말했다. 이제 정말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한다. 설은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하얗게 타버린 할머니의 유품들 사이에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뭐지?”
설이 고개를 굽혀 손으로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푸른색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였다. 뜨거운 열기와 시커먼 연기 속에서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그것은 마치 예전의 할머니처럼 설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설아, 이야기를 들려줄까?”
<계속.....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