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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Sep 11. 2020

식물이 가르쳐주는 적당함

두 달 동안 아이폰 앨범에는 맛있고 푸짐한  브런치 점심과 저녁 사진들이 가득하다.

일년 전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오고 나서 혼자 간단하게 고구마나 두부를 먹는 저녁이 익숙했다.  살이 빠지고 난 뒤에 찌기 싫은 마음과 소화가 되지 않는 내 몸뚱이와 운동에 빠져 가볍게 먹는 삶이 좋았다.

쿼런틴이 시작되고 남자 친구와 한상 푸짐하게 저녁을 차려먹는다.  

덕분에 살이 찌는데 내가 굉장히 민감하다는 것과 그 민감함과는 반비례하여 잘 먹고 스트레스만 받는

의지박약의 나를 알아가고 있다.

고기를 좋아하는 남자 친구와 야채를 좋아하는 나의 식성이 반반씩 섞인 밥상, 빵 굽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언니의 빵들 (그리고 나도 빵을 매우 사랑한다)

쿼런틴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관찰과 활동이 또 있다. 과일과 야채를 먹고 씨가 생기면 흙에 심는다. 바질, 깻잎, 복숭아, 사과, 레몬, 아보카도 그리고 체리와 딸기, 파프리카가 기다리고 있다. 복숭아는 안에 큰 씨주머니를 칼이나 망치로 깨면 또 그 안에 작고 부드러운 갈색 씨가 나온다. 갈색 씨의 갈색 껍질을 살살 벗기면 상아색의 고운 속살이 나오는데 그걸 흙에 심으면 된다.


라고 글을 쓴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나 보다. 두 달 동안 깻잎을 따서 먹고 복숭아와 체리, 딸기는 새싹을 보는데 실패했다. 사실 복숭아는 싹을 세개 보았는데 물을 많이 주는 바람에 뿌리파리가 생겨서 죽어버렸다. 무화과와 금귤을 심었는데 흙이 넘치지 않게 물을 과하게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식물을 키우면서 적당함에 대해 매일 생각하게 된다. 잠시 몇 초 아니면 가끔은 하루 종일 적당함을 생각하게 된다. 쿼런틴 시작 전의 나는 녹색의 싱그러움에 반해 식물을 방에 데려다 놓고 감상은 잠시, 관심도 두지 않아 말려 죽였다. 세상 밖에 내 관심을 가져갈 것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방에 돌아오면 식물을 들여다볼 시간에 나는 나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잠들기 일 쑤였다.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니, 밖에서 보던 녹색들이 방에 더 있었으면 좋겠고, 동물을 키울 여력은 안되니 뭐라도 꿈틀꿈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식물을 하나 둘 씨앗을 열개 스무 개씩 심기 시작했다. 흙을 너무 꾹꾹 채워도 물이 제대로 화분을 빠져나가지 못해 과습으로 죽거나 씨가 썩었다. 눈에 자꾸 들어오니 매일매일 눈을 뜨면 물을 줬더니 과습으로 썩는 식물이 생기고 뿌리파리들이 알을 낳아서 날파리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나씩 여전히 배워나가고 있다. 이 식물은 얼마나 해를 받으면 좋아하고 어느 정도의 양으로 몇 날을 간격으로 물을 주면 좋은지. (사실 여전히 아침에 의식처럼 깻잎이랑 레몬이랑 사과랑 아보카도에게는 조금씩이지만 매일 물을 준다.), 분갈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흙이 물을 너무 오래 담고 있지 않으려면 뭘 섞으면 좋은지, 씨앗 간의 간격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정확하게 계량된 지식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예와 아니 오를 알게 된다.


적당함이란 식물에게 있어 정말 중요하구나. 사람 관계에서의 적당함은 오랜 시간이 걸려 알게 되는 것 같은데 식물은 금세 티가 난다. 그래서 적당하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할 수 있게 돼서 좋다.  사람 관계에서 항상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마음과 적당한 걱정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혼자 남들보다 몇 보는 앞서가고 더 많은 마음을 적금 붓듯 부어버리는 사람이라, 인정하기 싫지만 상처도 많이 받고, 혼자 조용한 집착을 많이 하게 된다. 나에게 서운해하는 사람에게 나는 화가 나다가도 그 사람이 먼저 나에 대해 쉽사리 관계를 접는 동안 나는 질질 질 물 덜 짠 수건처럼 혼자 또륵거린다. 뚝 뚝뚝 뚜욱 그러다 언젠가 수건도 바삭바삭하게 마를 텐데, 내 마음은 언제면 바삭바삭 해질까.


쿼런틴을 처음 시작할 때는 2주면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개월이 돼간다. 4개월 동안 나는 몸도 마음도 뭔가 지난 1년보다 많이 바뀌었다. 살이 쪘으니 몸은 동글동글 해지고 살들이 부대낀다. 마음은 안정적인가 싶다가도 바뀐 인간관계가 아직 서운하고 서럽다. 적당함을 찾아가는 중이면 좋겠다. 내가 정성을 들인 식물들에게서 배워 나가는 적당함이 나 스스로에 대해서나, 사람들에 대해서나 많은 나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적당함을 배워가는 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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