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이유는 그냥 '예뻐보여서'였다. 풀어서 쓰면, 예쁜 노트를 사서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나간다는 것이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자아를 세워주는 것 같아서.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가 짧아져 갔다. 목표는 희미해지고 어느새엔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었고 별다를 것 없이 되풀이되는 내 일상을 그대로 녹여내고 있었다. 그렇다. 찬란했던 시간들을 함께해준 사람이 잠시 내 곁을 떠난 지금, 적어도 나는 다시금 나의 길을 되돌아보고는 있다. 내가 어떤걸 좋아했었는지. 내가 어떤걸 싫어했었는지.
나는 그래도 꽤 윗사람의 말을 '잘 듣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 잘 듣는 인생'은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노예가 되는 인생이었다. 나는 사회가 바라는 '사람'이 되는 안전한 길을 택했고 내가 살아가면서 맞부딪칠 수 있는 수많은 위험을 하나라도 더 많이 인지하고, 피하고 싶어서 최대한 열심히 발버둥쳤다. 그런데 이제와서보니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내 삶의 단조로움이 조금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의 합격증만 기억이 난다. 소중한 사람이 꿈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나를 떠나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순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혀 문제 없다고 했었다. 나는 버텨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처음 그 사람을 봤을 때, 뭔가 이상한 끌림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 나는 그게 뭐였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게 그 사람과의 미래를 계획하고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암시 같은 거였을까?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1초면 확인이 가능한 메신저도 있고,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다가 보고 싶으면 그냥 화상전화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감정 소모를 걱정하는 주변인들의 이야기와 먼저 장거리 연애를 경험해본 경험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찾아보면서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힘들어하고 포기했을까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직접 겪고보니,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제자리 걸음중인데, 이것 저것 합격해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그 사람의 세계가 나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외롭고 힘든데 타지에서 신선한 도전을 하는 그 사람이 야속해서 알아줬으면 하고 아기처럼 응석부리다가도 지금 같은 시대에는 독립적으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모래성을 쌓다가 망가뜨렸다가. 작은 자취방 안에서 여러가지 자아를 만들어냈다. 그저 시간을 벗삼아 흘러가듯 내버려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음에도 시간을 벗을 삼는 일이란 한없이 어려웠다.
" 몸 건강 잘 챙기구. 아프면 안되요.(보고싶어)."
" 점심 저녁 잘 챙겨먹어요.(보고싶어). "
" 잘자요.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 많았어요.(보고싶어). "
" 보고싶어."
내가 없었던 그 사람의 시간들이 어땠었는지, 어떤 것을 물어봐야 할지 선택할 때 잠시 시간이 작은 덩어리로 뭉쳐지면 밀어내듯이 하는 말, '보고 싶어'. 메신저에서의 우리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그냥 담백한 네모가 되어갔다. 늘 설레고 싶은데, 어떤 모양인지 짐작이 안되었으면 좋겠는데, 네모지다고 해서 덜 사랑하는 게 아닌데. 보고 싶다는 말의 무게가 가벼워질까봐 무서웠지만, 그렇게 그렇게 시간의 초침을 한톨 한톨 묵묵히 밀어낼 뿐이었다.
' 나도 표현하는 것보다 더 힘들긴 해. 하지만 이걸 다 이겨내야 지겹도록 행복하게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내가 널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건 정말 행복한 사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