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추억이 되겠지."
설렜던 시작 예쁜 옷 입고 공항 가는 길
공항에서 마시는 특별한 맥주
뭘 사 올까 체크도 해보고
온라인 면세점 물건도 받고 환전도 하고
새벽에 도착한 방콕. 십 년 전 어린 나이에 이곳에 가족들과 함께 놀러 왔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보다 새벽 비행기는 더 힘들었다. 입국심사를 하는데 우연히 까다로운 검사관에게 걸린 탓인지 같이 나온 비행기 동료들보다 40분가량 더 줄을 길게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먼저 보내야 했기에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기 일보직전. 늦은 시간에 도착한 게 숙박비가 아까워서 절약차 들렀던 공항의 5분 거리 숙소는 에어컨조차 틀어져있지 않아 덥고 습했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샤워를 마친 뒤 엄마와 나는 가두어놓은 개구리 두 마리가 되어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일찍 일어난 부스스한 엄마가 호텔에 실망한 눈치다. 나도 이렇게나 힘든데 엄마가 오죽했으랴. 비행기 안에서 먹겠다고 한국 공항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대충 베어 먹고 처음으로 이곳에서의 모바일 택시 서비스 Grab을 이용해 이동할 차를 불러보았다. 도대체가 이렇게 쓰는 건지 반신반의하면서.
속이 좋지 않았던 엄마는 과연 굉장하다던 방콕의 교통체증 속에서 지난밤의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는지 내 옆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이크와 트럭 뒤에 탄 소녀들 아저씨들 아줌마들이 위태위태하게 내 옆을 지나갔다.
첫날 잠자리에 비하면 참 어마어마한 호텔에 도착했다. 미드에서 본 것처럼 마음대로 유창하게 되지 않는 영어가 부끄러웠다. 안내를 해주는 리셉션 데스크의 여자분이 입은 옷이 참 선이 고왔다. 웅장한 기둥 장식과 호접난으로 그득하게 장식된 로비는 그야말로 궁전이었지만 엉뚱하게도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미련한 생각까지 불러일으켰다. 가방들을 맡겨두고 엄마와 방콕 시내로 나가보기로 한다.
호텔에 붙어있다던 지상철역이 아무리 걸어도 보이 지를 않는다. 쇼핑몰이 문을 열 시간이 아니라서 뙤약볕으로 걸어서 이동한 게 흠이었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듯한 더위속에서도 파라솔 아래의 방콕 주민들은 야외에서 튀김을 먹기도, 쌀국수를 사 먹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낮에 하는 야시장 같은 골목을 가로질러 대충 감으로 지상철 역을 찾아 걸었는데 도착해보니 우리 숙소의 다음 역이다.
"엄마 괜찮아? 안 더워?"
"응"
"일단 열차 타면 하나도 안 더울 거야 좀만 참아."
이번 여행에서는 똑소리 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결혼해서도 독립해서 예쁘게 가정을 잘 꾸릴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니까. 더욱이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다 보니 영 엄마가 신경 쓰였다.
처음으로 도착한 쇼핑몰. 지금까지의 방콕을 잊으라는 듯 너무나 크고 화려해서 이질적인 곳이었다. 백화점 입구에 보안용 문과 경비가 서 있어서 이곳은 입장하는데 소지품도 체크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이곳에 있는 모든 쇼핑몰에 다 구비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명품 매장에 줄을 서서 구경하러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근처에 있다던 구석의 맛집을 찾아 백화점을 끼고 돌아서 걸었다.
간판도 제대로 없는 뒷길의 골목 속에 숨겨져 있는 식당은 미로 속의 쉼터 같았다. 매장 안에는 시원한 허브향이 가득 차 있고 천장에는 빈티지한 화분들이 우아하게 매달려있었다.
" dissert for cloud sugar cotton? "
" okay. Every Korean ordered this one?"
주문을 받는 웨이터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원하는걸 먼저 물어보았다. 가게 안에 한국말이 들리는 걸 보니 여기도 한국인들에게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아침을 아직 먹지 못한 터라 엄마와 나는 컬리플라워가 들어간 오믈렛과 '거부할 수 없는'이라는 제목을 가진 팬케이크를 하나씩 주문했다.
" 정말 시원하다. 오랜만에 이런 좋은데 와보네. "
" 응 가게가 너무 예쁘다. 오가닉 푸드라더니 주문하고 나서도 꽤 한참있다가 나오네. "
" 근데 이게 뭐지? 약간 스팸처럼 생겼는데 식감이 너무 뭉글뭉글해. "
" 아저씨한테 물어볼까? "
" 얘 이거 혹시 그거 아냐? 푸아그라? "
" 뭔 소리야. 그거 비싼 음식 아냐? 그런 게 여기 왜 있어. "
" 윽... 그런 거 같은데. 뭔가 입속에서 <푸아 푸아> 했어. 이상하다. "
분명 이상하긴 했다. 내가 주문한 건 팬케이크였는데 팬케이크보다 위에 올라가 있는 닭다리 같은 고기 살이 더 큼직했다. 엄마가 먹은 의문의 스팸 조각은 아주 작았지만 느낌이 정말 특이해서 한 번도 맛보지도 구경해보지도 못한 음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배가 고픈 나머지 음식 가격은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제목에 있는 팬케이크라는 단어만 보고 주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Excuse me sir. what is this? chicken? "
" It's a duck. and that also from duck. Foo. "
웨이터가 말한 건 분명한 '푸아그라'가 아니었지만, 뭔가 푸아그라 비슷한 발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사색이 되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평소에 새에 대한 포비아가 있었던지라 치킨을 제외하고는 이런 음식을 싫어하는 엄마. 나도 푸아그라는 만드는 방식이 비인간적이라고 들어서 선뜻 먹어볼 생각도 없는 음식이었다.
" 우아,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걸 먹어보다니 으어억. 맙소사. "
배꼽을 잡고 웃었다. 분명 괴로워하는 엄만데, 엄마는 방금 전에 자신이 먹은 게 믿기지 않아서,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여서 우리는 서로 한참을 되새김질하며 웃었다. 웃은 건 웃은 건데, 방콕까지 와서 팬케이크인 줄 알고 어마어마한 걸 시켜버리다니. 다음으로 서빙된 시그니처 디저트인 무지개색 솜사탕을 북북 뜯어내면서 우리는 얼굴 근육이 당기도록 한껏 웃으면서 영상을 남겼다. 물론 지불해야 했던 웃음의 대가는 의도하지 않게 조금 비싸긴 했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시작이다.
첫날이기도 하고 배부르게 먹었으니 조금 멀리 가보자고 결심한 우리는 블로그만 믿고 허세 부리는 여행이 최악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준 대망의 장소에 다다랐다. 역에서 15분 정도만 걷는다고 해서 방심했던 게 실수였을까. 분명 그곳까지 걸어가는 길목에도 이것저것 예쁜 것들이 볼거리가 많아서 이왕이면 택시가 아니라 꼭 두발로 걸어서 가보아야 한다고 말했던 인터넷 어느 블로그의 글이 눈물 나도록 원망스러웠다. 한참을 걸어 골목 사이에 끼어있는 그곳에 도착했지만, 이미 점심을 푸지게 먹었던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현지의 아름다운 수공예품도 예쁜 조형물도 그 어떤 것도 아닌 평범한 양식집이었다. 창고 같은 곳에 개방감을 주어 우리나라 파주 출판단지 같은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오픈된 공간은 더위를 잠시 피해갈 수 있는 대형 선풍기 몇 대가 돌아갈 뿐이었고, 긴 걸음으로 찾아온 우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 정말 이게 다야? "
" 응. 도대체 이런 곳에 왜 꼭 한번 와봐야 한다고 홍보를 해둔 거지? "
" 글쎄, Grab 불러서 다시 돌아가야겠다. "
결국 우리는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못한 채, 점심을 먹었던 그 쇼핑몰로 다시 돌아왔다. 엄마는 지하에 있는 대형 식품매장을 구경하고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저녁을 먹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들러보자고 말했다. 지하 식품 매장 앞에는 자그맣게 조성해놓은 폭포가 있는 광장에 사람들이 여유롭게 앉아서 맞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이미 더위에 한참 찌들어 있었던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아 시원한 맥주와 새우 파스타를 하나 주문했다.
" 엄마. 식탁에 개미 있어. "
" 엥? 여기는 없는데? 많아? "
" 응. 이게 나무로 된 식탁이라 그런가 봐. 구멍으로 엄청 바글바글한데 어떡하지? 으으.."
" 대충 빨리 먹고 일어나자. 시원해서 좋긴 한데. "
완벽해도 모자랄 엄마와의 여행에 자꾸 손톱만 한 흠이 생기는 느낌이다. 그래, 그래도 한국에서 엄마 생일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마사지가 기다리고 있으니 견뎌보자. 나는 바우처를 왼손에 꾸깃꾸깃하며 부지런히 스파로 이동했다.
덕분에 마사지를 받는 동안 편히 쉬기는 했지만 문제의 그 손톱만 한 흠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마사지를 시작하기전에 각자의 몸 상태를 묻는 문항을 내가 작성했는데 나는 너무 강도를 약하게 해서 아쉬웠고, 엄마는 손가락 관절이 아프다는 걸 내가 깜박하는 바람에 마사지사가 손가락을 자극해서 살짝 아팠다고 했다. 게다가 필링 오일 제품이 얼굴에는 맞지 않았는지 호텔로 돌아와서는 트러블에 시달렸다. 엄마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하고 계획한 여행인데 불안함이 엄습했다.
" 엄마랑 같이 여행 오신 건가요? 부럽네요. 저도 곧 엄마랑 여행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
" 어라 한국분인데 여기서 일하고 계시나 봐요. "
" 네. 여기 엄마랑 딸이랑 다들 많이들 여행 오시더라고요. 저도 엄마랑 갈만한데 추천 좀 해주세요. "
" 여기 있는 미니바는 전부 무료로 제공되시고요. 혹시 베개가 마음에 안 드시면 편한 재질로 바꿔드린답니다. "
엄마가 사랑하는 백화점 지하의 식품매장에서 세계 각국의 식품과 현지 간식거리를 구경하고 재밌어 보이는 맥주를 사들고 돌아온 첫 호텔방 입장. 안내해주시는 언니가 미니바가 무료라고 말한다. 괜히 무겁게 맥주를 이고 지고 먼 길을 걸어서 돌아왔건만. 언니. 어머니 데리고 여행 올 때 저처럼 하면 안 되실 거 같아요.
평소에 가족들 출근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을 꼭 준비해주는 엄마는 여행을 와서도 일찍 일어났다. 오늘에야말로 맛있는 조식으로 기쁘게 해주리라. 방콕스타일의 오믈렛은 한국의 굴전이었다. 메뉴판을 가져다 주니 괜히 또 돈을 내야 하는 거 같아서 제 발이 저린 나는 몇 번이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웨이터와 이야기해야 했다. 그래도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국에 있는 아빠와 통화하는 엄마를 보니 이제 결혼으로 정말 집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밀려든다. 오늘 일정은 꼭 성공하리.
오늘의 투어는 근처 쇼핑몰을 잠깐 둘러보고 와서 수영장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사실 어제 백화점에서 충분히 구경을 해서인지 호텔 근처에 있는 몰에서는 크게 볼만한 것들은 없었다. 엄마와 내가 찾는 건 현지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이었지만 거의 웬만한 공산품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가격이 그렇게 메리트 있지도 않았다. 나는 예쁜 수영복을 찾아 헤매었지만 인터넷에서 말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특별한 '무엇'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명품 매장을 한땀 한땀 구경해야 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으니. SNS에서 말하는 것들은 다들 단지 여행의 특수효과였던 걸까. 다만, 달콤한 디저트들을 위한 엄마와 나의 위는 항상 오픈되어 있었다.
호텔 수영장은 꽤 근사했다.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 선베드에 늘어져서 반짝이는 물. 내가 상상했던 여행의 영화 같은 그림이 그려지기는 하는 모양이다. 뒤집어져서 동동 물에 떠서 엄마랑 몇 분간 물놀이도 했다. 머리가 크고 나서는 이런 시간들이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아프게 타지 않도록 엄마 등에 오일을 발라주는 것조차도 귀찮아하면서 나는 내가 바라는 '엄마와 딸'에 대한 여행의 의미에 남다름을 부여하려고 너무 애를 썼나 보다.
이미 지친 엄마를 데리고 야시장의 추억을 만들겠다고 배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무료 보트 셔틀이 있다는 역에 도착해서 교통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나오려는데 별안간 어디선가 살짝 비장하면서도 웅장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 얘, 기다려. 움직이지 말아봐. 사람들 다 안 움직이잖아. "
" 응? 뭔 소리야? 왜 안 움직여? "
" 몰라. 그냥 멈춰야 되나 봐. 기다려봐. "
" 어라. 정말이네. 뭐지? "
" 이거 국가 아냐? 옛날 우리나라도 이런 거 할 때 멈추고 그랬는데. 왕이 있는 나라라 그런가? "
길을 가던 시민들이 플래시몹처럼 일제히 멈춰서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떨구는 사람들도 보였다. 태국에 대해 정말 아무런 조사 없이 왔다가 뜻밖에 만난 신기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런 걸 미리 엄마한테 말해줬어야 하는데.
강 건너 야시장에 가기 위한 무료 선박이 있는 선착장에 줄을 섰다. 여기저기에서 한국말이 또 들려오는 걸 보니 제대로 맞게 찾아온 듯싶다. 한국인 임산부 한 명이 긴 줄에서 맨 앞으로 와서 줄을 섰다. 관리인이 뒤로 가라고 제지를 하자 임산부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국말로 자신 있게 외쳤다.
" 왜요? 저 임산부인데요? "
왠지 모를 불쾌함을 느꼈다. 그 긴 줄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가족들과 아이들이 질서정연하게 줄 서있었는데,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새치기를 하면서 그것도 한국말로 임산부라고 하다니. 임산부는 배려해야 할 사람들이 분명히 맞지만, 그 여자의 태도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비행기 타고 오면서까지 한국 사람들의 나쁜 모습들만 구경하려고 온 여행이 아닌데. 이번 여행에는 유독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서 서글퍼졌다. 강 주변이라 피부로 차오르는 습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엄마도 나도 이미 어항 속에 있는 것처럼 더위와 습기로 온몸이 축축해졌다.
도착한 곳에는 벌써 관광객들이 하나 둘 pub에 앉아 강바람을 즐기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야시장 자체가 커서 안을 구경하는데도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일단 이 물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우리는 가까운 수공예품 가게로 들어갔다. 구경하는 동안에는 에어컨 때문에 잠시 쾌적했지만, 걸어 들어갈수록 더위와 습기는 더 심해졌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엄마의 체력 배터리도 이미 소모가 컸나 보다. 몸이 힘드니 더 이상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고 피로해져서 우리는 들어온 지 채 20분 만에 강변을 벗어나는데 합의했다.
" 엄마 여기 배 타는데 바로 앞에서 가기 전에 맥주라도 한잔 하고 갈까? 어차피 줄도 서서 기다려야 하는걸. "
"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니까. 좀 쉬다 가자. "
" 응. 동전 남은 거 잘 계산해서 쓰고 가야지. 이따가 계산은 내가 하고 따라갈게. 엄마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
배가 올 때까지만 딱 맞춰서 조금만 빨리 나갔으면 좋으련만. 내가 맥주를 계산하는 동안 배는 아슬아슬하게 떠나버리고 엄마는 맨 첫 번째 줄에서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15분 정도 더 기다려야 된데. "
"..... 좀 더 빨리 올걸. 웨이터가 거스름돈을 늦게 가져다줬어. "
변명 아닌 변명으로 메꿔보려던 나도 이미 체력적으로 방전 상태. 강변이라 유독 습기가 심해서 온 몸이 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엄마는 어항 속에서 빨리 벗어나 호텔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늘이 엄마의 생신인데,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버리다니. 일정을 너무 무리하게 진행해버린 걸까. 여정이 자꾸 미세하게도 2% 정도 결함이 나타나는 게 너무나 속상했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엄마의 지하 식품매장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선물로 전해줄 간식과 저녁에 호텔에서 먹을 과일을 사서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호텔방에는 엄마의 생일을 위한 초콜릿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 와, 엄마 이거봐. 그래도 생일이라고 케이크도 줬어. "
" 응. 예쁘다. 진짜 초코 초코한 초콜릿 케이크네. 사진 좀 찍어놔 봐. 아빠한테 자랑하게. "
일정따라 끌려서 돌아다니느라 딸내미한테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들은 엄마. 그래도 내 투어의 빠진 제일 중요한걸 호텔 측에서 채워줬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내일 우리의 비행기는 새벽 1시에 출발하는 밤 비행기였다. 그렇게 소중하고 어렵게 휴가 내서 온 곳인데, 남은 하루간 쉴 둥지 없이 어딘가를 계속 관광해야 한다는 건 느닷없는 불안과 부담으로 다가왔다. 전화를 들고 로비에 물어보니 오후 6시 이전은 반값, 6시 이후 체크아웃이면 하루치 방값을 다 내야 한다고 말했다. 5성급 호텔의 하룻밤이 부담스러워서 첫날 새벽에 도착했을 때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비즈니스호텔에 몸만 몇 시간 숨겼건만, late checkout을 하자니 이 또한 다른 부담이다.
" 지금 바로 정하지 말고, 내일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보고 말해. 너랑 아빠는 항상 그게 문제라니까. "
" 응. 알았어. "
오늘 조식은 어제 먹었던 식당 말고 다른데서 먹어보기로 했다. 호텔 한가운데 수영장이 있고 이 수영장을 레스토랑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보니 호텔측에서 조식으로 이용하는 식당이 두 곳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직원의 말로는 메뉴는 동일하지만 하나는 사람이 조금 덜 붐빈다고 한다. 두 번째 먹는 조식이다 보니 특유의 태국 음식에서 나는 향신료에 익숙해져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먹어보아야 할지, 먹으면 안 될지 꽤 빠른 시간에 파악이 끝났다.
" 정말이지 이 작은 쌀국수가 이번 방콕 여행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따뜻하고 가장 맛있는 거 같아. "
" late checkout은 하지 말자. 밖에서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을 거 같은데. "
" 그래. "
아직 구경하지 못한 쇼핑몰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단지 체력과 흥미의 문제일 뿐. 이번에는 첫날 그렇게도 찾아 해 매던 스카이라인, 도로 위를 걸어서 이용하는 쇼핑몰과 쇼핑몰 사이의 구름다리를 정말 잘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제일 실감 나고 가장 재밌는 게 보행이 아닐까 한다. 걷고 있으면, 정말 다양한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 흔한 교복 입은 소녀 하나만 보아도 그렇게 낯설고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젊은 태국 여자와 파란 눈에 금발을 하고 있는 서양 남자들의 조합을 꽤나 자주 목격했다. 처음에는 그냥 현지에서 만난 친구이거나 국제결혼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는 묘한 커플을 보고 있노라니 실체를 알게 되고 나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밖에서 10분 이상 걷고 있노라면 찜통에서 갓 나온 만두처럼 되어버리는 탓에 사실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밖에서는 그다지 오래 있지 못했다. 게다가 더위로 고생하는 엄마 때문에라도 그런 여행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 쇼핑몰은 층별로 국가의 콘셉트를 적용해서 1-2층은 도쿄, 3층은 런던, 4층 이상은 샌프란시스코 이런 특색이 있다더니 런던 층에 갔다고 해서 런던스러운 패션을 파는 건 아니었나 보다. (런던에 가도 도쿄 신주쿠나 아키하바라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옷들이 많았다.) 재밌는 건 엄마와 실제로 함께 갔던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만든 식당가에는 그때 함께했던 골든브리지게이트도, 피어 21도 미니어처처럼 아기자기하게 재연해두었었다. 아침 조식을 빵빵하게 먹고 왔던 우리는 그렇게 걸었으면서도 배가 고프지 않아서 신기해 보이는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다. 자그마한 코코넛 조각과 함께 비벼먹는 느낌의 아이스크림이었는데 이 작은 디저트는 한화로 치면 천원도 안 되는 정말 착한 가격이었다. 다만, 중앙에서 현금을 주고 그 가격에 맞는 카드를 사 와서 각 부스에 제출해야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서툰 여행자였던 나는 28밧 정도를 계산하는데 애를 먹었다.
" 어때? 맛있어? "
" 우와.. 이게 대체 무슨 맛이야? "
" 왜왜 나도 먹어볼래 어떻길래! "
".....? "
처음 먹어보는 코코넛 아이스크림. 달큼하면서도 같이 씹히는 비누조각 같은 코코넛이 참 이질적인 맛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선뜻 먹어보지 못하는 것을 먹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충격적인 맛. 결국 처음 목표했던 것처럼 신기한걸 잔뜩 사 오지는 못했다.
기대했던 오가닉 카페를 가보는 시간. 오늘은 저녁 비행시간까지 쉽게 지치면 안 되기에 체력을 될 수 있는 대로 아껴야 하는 탓에 앱을 켜고 능숙하게 grab을 불렀다. 그런데 이게 웬걸. 터미널 21 근처가 워낙 사람도 많고 차들이 많은 복잡한 교차로여서인지 차가 선뜻 잡히지가 않았다. 호텔 앞으로 가면 기사를 만나기가 더 쉬울 거라 생각했던 우리는 옆에 있던 THE WESTIN까지 힘들게 이동했지만, 그나마 잡혔던 기사는 지나쳤다며 취소 요청을 해왔다. 고민 끝에 결국 지하철을 타고 오가닉 카페와 가까운 Thong ro역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결국 방콕 여행에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시원한 에어컨이 풀가동되는 움직이는 호텔 BTS(지상철)를 포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나 보다. Thong ro역에서 한참을 기다려서 잡은 grab car는 작은 경차였다. 친절한 아저씨와 함께 편하게 함께 했다. 다만, 카페가 너무나 골목 사이에 위치했던 탓에 지도를 보여드리고 어렵게 어렵게 도착했다.
골목 사이에 위치했던 전체 통유리의 이 오가닉 카페는 생각보다 정말 내부가 작았다. 정원이라고 되어 있는 초록이들도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너무 더웠던 날씨 탓에 밖에는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한국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자리를 잡고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방문한 손님 모두가 한국사람들이었다. 저마다 코코넛 커피와 코코넛 아이스크림, 망고 아이스크림 등을 주문한 것 같았고, 은색으로 된 자그마한 양은 도시락에 토마토 파스타, 대나무통밥, 치킨카레 같은 오가닉 푸드들을 곁들이고 있었다.
" 대체 여기가 한국이야 방콕이야. "
" 그러게. 정말 다 한국 사람들이네. "
그 순간 비로소 우리나라 메인 포털사이트에서 방콕 맛집, sns에서 한글로 방콕 예쁜 카페를 검색해서 찾은 게 실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페가 카페인지라 현지의 특유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날씨 더운 날 가로수길을 걷다가 비슷한 카페에 들어와 앉아있는 이 느낌이 너무나 싫었다. 더욱이 옆 테이블에서는 저 여자가 입은 옷이 별로라는 둥, 같은 한국사람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마저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사람들의 여행 차림은 대부분 그냥 길거리를 걷다가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려했으니까. 평소에 입지 못하는 것들을 마음껏 입어보기라도 해보자는 해방감 때문인지, 평소에는 이웃나라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점잖은 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만큼은 색깔의 선택마저 자유분방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차림을 비난할 권리가 같은 한국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더위도 더위였지만, 옆 테이블에서 험담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우리는 다시 방콕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카오산로드를 구경하기로 하고 다시 Grab을 불렀다. 똑같은 행선지에,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하는 여행이 질려 있었던 나는 나름대로 절대로 이것만은 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 있었다. 유명한 햄버거집 앞에 서있는 햄버거 아저씨 , 로날드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것. 이름도 '로날드'인 주제에 태국이라고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고 있는 아저씨는 그냥 눈으로 담아두기에도 충분했다. 역시나 삶아지는 듯한 더위 때문에 오래 걷지 못했다. 지나가다가 더위를 식혀보고자 들른 맥주집에서 얼음을 가재 수건 한가득 담아 목에 두르고 선풍기 앞에 앉아 타이식 샐러드를 입에 우겨넣어도 한 시간 이상 머무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사지나 받자며 주변을 검색해서 찾아간 스파. 발마사지만 신청했는데, 열심히 다리를 문질러 주다가 어깨까지 풀어주는 친절한 태국 마사지사 여성분 덕분에 더위에 지쳤던 우리의 기분은 조금이나마 행복해졌다. 굳어있는 내 유연함에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모습까지 참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졌다.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몸을 만져야 하는 것이 분명 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숙소에 맡겨놓은 가방을 찾기 위해 잡은 Grab택시는 조금 특별했다. 카오산 로드 끝자락에 있는 경찰서 앞에서 승차했는데, 하필이면 현지 경찰이 우리 운전사에게 면허증(?), 등록증(?) 같은걸 요구해서 잠시 길가에 멈춰있었다. 뭉특한 영어로 어디 출신이냐고 묻는 경찰에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코리아'를 외쳤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듯, 운전사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조용히 데려가 주었지만 이 사람은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는지 무슨 일이냐는 내 질문에 선뜻 답을 해주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핸드폰에서 통역 어플을 열어 한국어로 '실례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해서요. 방콕에서의 Grab서비스는 혹시 불법인가요?'라고 입력한 다음, 태국어로 번역해서 운전사에게 보여주었다. 운전사는 어수룩한 영어로 좀 전에 멈춘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신 또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고 답해주었다. 여행에서 가장 여행스러운 순간이 아닐까? 잠시나마 현지인과 대화를 해보고 현지에서 겪을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이 백만금을 주고 갈 수 있는 비싼 식당이나 카페보다 훨씬 즐거웠으니까.
방콕의 교통체증은 어마어마하다더니, 정말 그랬다. 카오산로드에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한참 걸린 우리는 짐을 찾고 공항에서 입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래 걸어서 지쳐 입을 떼기도 힘들었던 나는 호텔에서 불러주는 공공 택시를 기다리기까지 잠자코 로비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이 놈의 공공 택시가 어찌나 과속을 하는지 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정말 날아갈 것 같아서 엄마와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계기판의 숫자를 계속 쳐다보았다.
" 이 사람 지금 140km로 달리는 거 같은데 저 계기판은 100km야. 진짜 맞는 건가? "
" 그러게. 좀 무섭다. 아까 보니까 고속도로 통행료는 한화로 몇천 원 밖에 안 하던데.
호텔에서 불러서 그런지 택시비는 엄청 비싸게 받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먹은 게 오후 3시쯤 샐러드에 먹은 맥주 한잔이 전부다. 체크인은 아직 열리지도 않아서 마냥 기다려야 하는데, 지쳐서 배춧잎처럼 늘어져 있어도 모자랄 판에 공항은 어마 무식하게 커서 말투에서 살짝 신경질이 섞여 나왔다.
" 아.... 엄마, 우리 그냥 아래층 가서 뭐 좀 먹고 들어가자. 들어가서 먹는 건 무리인 거 같아. "
" 그래. 뭐 먹어야 되지? "
" 뭔가,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 같은 게 먹고 싶어."
메뉴판에서 순두부찌개 비슷한 쌀국수를 찾았다. 제목은 'Rice Noodle.' 분명 내가 잘 먹지 못하는 똠 양 꿍은 아니다. 가격은 한화로 약 9천 원 정도. 우리나라 공항 음식만치 비쌌다.
" This one, and this one please. "
빨간색 쌀국수와 새우 완탕을 하나 주문했다. 방콕이라 하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물가였는데 기다림 끝에 나온 음식은 정말이지 아기 손바닥 만한 양이었다. 배가 고파서 실망할 겨를도 없었던 나는 숟가락을 바로 집어 들었다.
" 으악. 뭐야 이거. 똠 양 꿍이야. "
" 응? 아까 라이스 누들이라고 쓰여있었는데. "
메뉴판에 그저 Rice Noodle이라고만 쓰여있었다고 얼큰한 쌀국수를 상상하고 똠 양 꿍이 아니라고 장담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웨이터를 불러서 확인했지만, 주문한 그 메뉴가 맞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화가 나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좌절이었다. 너무 배가 고픈데 국물에서 깊은 시큼한 맛과 고수의 향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이 음식을 제대로 즐길 줄 몰랐던 나는 새우를 몇 개 건져먹고 먹는 걸 포기했다.
체크인을 위해 다시 줄을 섰는데 내 뒤에 따라오던 한 그룹의 중간에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한국인 아저씨가 술냄새를 풍기면서 가방에 있던 소주 한 병을 급하게 뺐다.
" 아버님. 액체는 수화물에 보내셔야지 반입이 안돼요. 다시 집어넣으셔야 됩니다. "
가이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그분은 이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휘청거리며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 엄마, 마냥 여행만 다닐 거 같은 여행사 가이드도 생각해보면 참 힘든 직업이야. "
" 그러게. "
늦은 비행기 탓에 하루 여정 동안 고단한 몸을 씻지도 못한 우리는 라운지 이용권을 따로 구매해서 샤워를 하기로 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샤워 한 번만 할 수 있다면 그 정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몇 초라도 빨리 깨끗이 샤워하고 공항의 의자에 늘어져서 아무 생각 없이 비행기만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절박했다. 하지만 우리 비행기의 게이트는 멀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느긋한 마음으로 직장 동료들의 담배와 먹거리 과자도 골라보고 맥주와 함께 맛있는 음식도 음미하면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거였는데, 아무리 걸어도 구역별로 엄청나게 많다는 라운지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엄마도 슬슬 지쳐가는지 할 말을 잃어가는 모양이다.
" 다 왔다. 저기가 라운지인가 봐. "
" Sorry. We don't have a shower facillity in this lounge. You have to go section G2 lounge. "
이곳까지 걸어오는데 걸린 시간이 얼마이거늘, 태국 언니의 말은 정말 매몰찼다. 이 거대한 공항도 라운지마다 다 샤워부스가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관광객 수요 폭증을 대비해 자신 있게 만들었다던 태국의 최신 공항은 크기만 컸을 뿐, 뜻밖에도 우리 공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 저쪽으로 가야 된데 엄마. 조금만 더 움직이자. 어휴. "
" 그냥 샤워하지 말고 비행기 타자. 엄청 멀리 가야 하는 거 아냐 또? "
" 안돼. 나 꼭 샤워하고 싶단 말이야. 엄마도 샤워하고 나면 좀 더 개운해질 수 있을 텐데. "
엄마를 질질 이끌고 찾아간 G2 라운지의 안내 직원은 다소 불친절했다. 샤워시설이 어디에 어떻게 붙어있는지, 안에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안내조차 받지 못하고 우리는 라운지 안에서까지 샤워부스를 찾아 헤맸다. 기어코 도달한 샤워부스는 딱 2개. 그것도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어서 줄을 서 기다려야만 한다. 세면도구도 없어서 아주머니가 가져올 때까지 잠자코 거울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작은 돈을 내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계속 엄마를 데리고 서서 목표한 것을 해내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것 같아 초조해진 나는 다시 로비로 나가서 샤워실이 겨우 2개뿐이냐고 물었다. 태국 직원은 짜증 난다는 듯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가 기다리기를 5분. 청소를 도와주시는 직원이 와서 위로 올라가라는 말을 전했다. 뭉특한 영어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나는 샤워실이 문을 닫는다는 줄 알고 되물었다.
" Pardon? "
" UP. UP Stair! Come! "
" 따라올라오라는데 엄마? "
" 왜? 샤워실 또 있나? "
라운지 내부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직원을 따라 올라가니 아무도 없는 샤워부스 2개가 있었다. 바로 위층에 줄을 서지 않는 샤워부스가 떡하니 있었는데 기다린 지 15분이 지나서야 지나가던 청소하시는 직원분이 우리를 그쪽으로 안내해준 것이다. 샤워고 뭐고 급기야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을 꾹 눌러 담고 묵묵히 안으로 들어갔다. 어메니티가 있을 것 같았던 안에는 벽에 붙어있는 샴푸통 하나와 일회용 칫솔이 전부였다. 그나마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방콕에 온 게 후회스러워서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대충 머리를 감고 말리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 우리 비행기가 F구역이니까 라운지 밖으로 나가서 다시 다른 라운지로 들어갈 수 있는 거면 지금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
" 응. 내가 물어볼게. 가자 엄마. "
불행 중 다행인 건지 어떤 구역 라운지라도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비행기 근처의 F구역 라운지로 옮긴 우리는 3시부터 곪은 배를 부여잡고 라운지 안에 있는 음식을 집어 들었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건 맥주밖에 없었다. 단지 라운지 이용을 위해 지불한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엄마를 모시고 온 여행인데 이런 음식을 먹게 하고 하루 종일 걷게 만든 걸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속상해서 울화가 치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행기에 맥주라도 하나 가지고 탈걸 그랬는지 싶다. 식은 닭고기 카레의 닭 쪼가리를 포크로 집어 들던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 이것도 추억이 되겠지."
조금 더 행복하고 편하고 좋은 추억이었으면 좋으련만. 엄마와 함께 저녁 비행기를 그것도 합리적인 가격을 위해 작은 LCC를 이용하겠다고 계획한 내 선택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억지로 잠을 청하느라 여행 첫날 좋았던 기분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앞자리에 앉은 한국인 남자는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핸드폰으로 영어문장을 중얼중얼 외웠다.
" 제가 먼저 주문했는데 옆 테이블 음식이 먼저 나왔어요. "
" 고기를 다시 구워주세요. 제가 주문한 것은 이게 아니에요. "
짜고 치기라도 하는 건지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든 문장이 다 부정적이고 불평뿐이다. 옆자리에서는 힘에 겨운 아기가 버둥버둥 울부짖었다. 어떤 하늘 위에 있는지 어디쯤 오고 있는 건지 화면이 없어서 남은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어 더 길게만 느껴졌나 보다. 신고 온 샌들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어있는 엄마의 발은 나를 더욱 죄책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 이 유부초밥 너무 맛있다. 그래도 한국사람이라고 한국음식이 훨씬 맛있는 거 같아. 제대로 밥다운 밥 먹어보네. "
" 응. 거기랑 가격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거 같아. "
" 그래서, 엄마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였어? "
"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거 같다. 너는 너 기분 나쁠 때 너 맞춰줄 수 있는 남편이랑 살아야 되는데."
" 나 별로 화낸 적 없었던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나 맞춰줬어? "
" 다행인 줄 알아. 엄마랑 여행 가는 것도 이게 끝이니까. "
"...... 끝인 줄 아니까 더 잘할라고 했던 거지. "
나는 그래도 엄마가 재밌었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도, 내 Tour가 실패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게 있었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여행도 다 끝난 마당에 이런 기분이라니. 비행기 안에서 잠을 못 자서 더 이상 뭔가 말할 기운도 없었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원망스러움, 엄마에 대한 서운함에 집에 오는 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속상함에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엄마도 집에 오는 내내 불편했는지 못내 말을 걸어왔다.
" 씻고 어서 쉬어. "
"....... "
출근하고 원래 리듬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는 이렇게 답장이 왔다.
' 그렇지 않아. 너한테 짜증이 났던 게 아니야. 바보야. '
' 잘 놀고 와서 왜 그러니. '
인터넷 어딘가에서 부모님의 사진 혹은 영상을 담을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충분히 저장해두어야 한다고 말했던 충고를 보았다. 그래도 요 며칠 함께 고생한 탓에 내 핸드폰에는 엄마 사진이, 함께한 사진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집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그곳은 우기로 접어들어서 일주일 내리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왔다. 비가 오기 전에 여행을 무사히 다녀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이 좋은 여행이지 않은가. 속상했던 추억들도 결국 추억이다. 갈등이란 게 아예 없진 않았지만, 엄마와 딸의 여행이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인 시간이니까. 힘든 여정에도 함께 즐겨준 엄마에게 너무 고맙다. 끝인 줄 알았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다. 지갑사정이 허락된다면, 여전히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다음번 생신에는 완벽한 여정을 준비하는 것보다도 그냥 따뜻한 말 한마디와 케이크, 샴페인 한잔 정도면 완벽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