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실패자 소심쟁이가 지금까지 깨달은 것들

나의 6년 전 교환학생 실패기.

by 향순



" 엄마, 여기 왜 왔어.. 훌쩍. "

" 네가 전화로 막 우니까 걱정돼서 왔지. 그 OO 년 어디 갔어. "

"....... "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영원히 나오지 않을 요량으로 1, 2학년 저학년 후배들이 득실거리는 초등학교 복도를 끝에서부터 끝까지 눈물을 훔치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위층에서는 그 여자애가 자기 패거리를 데리고 나를 잡아 족치겠다며 이 잡듯 찾아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나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러워서 서러운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대성통곡을 했더니만, 엄마는 학교까지 찾아와서 안 그래도 반애들 전체 앞에서 대놓고 욕을 들으면서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아 창피한 나를 더욱 마마걸로 만들어 놓아 버린 겁니다. 찾아와 준건 너무 고맙고 안심인데 이 창피함은 또 어쩔까요. 나중에 그 아이가 나에게 복수라도 하면 어쩌죠?


사단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이니까 당연할 거예요. 전 부모님한테 받는 칭찬을 낙으로 사는 아주 전형적이고 순종적인 평범한 애였습니다. 단점이 있다면 너무 바른 길로만 가려고 했더니 이따금 친구들에게 미움을 사곤 했지요(한마디로 티 나게 재수 없는 아이).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켰습니다. 그게 아마 아이들에게는 지나친 잘난 척 정도로 여겨졌나 봅니다. 숙제를 해오라고 하면 친구 것을 쓱 한번 살펴보고는 '너는 그것도 못하냐? 공부 좀 해라.'라고 당당하게 핀잔을 주는 맹랑한 꼬맹이였거든요. 그 날 하루를 제게 수치심이라는 지옥을 맛 보여줬던 아이는 나름대로 옆 동에 사는 단짝 친구였습니다.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다른 친구에게 제가 자신의 욕을 했다는 게 그 아이의 진술이었습니다. 반 친구들 전체에게, 나는 용서받지 못할 대역죄를 지은 죄인임을 어필하면서요. 그날 수치심은 맹랑하던 꼬맹이를 시도 때도 없이 눈치를 살피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소심쟁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소심쟁이의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와 지리였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 이외에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는 재미가 가장 큰 과목이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크고 대중매체에서 간간히 보여주는 외국의 새로운 문화에 로망을 잔뜩 품고 나서부터는, 교환학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지원하기 위해 밤낮 안 가리고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결승선에 도전해서 그것을 완주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저 주야장천 나 자신과만 대화하면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닫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가고 싶어서 왔던 교환학생인데, 혼자가 아니라 외딴 타지에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달려야 하는 건 어려웠나 봅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교환학생 경험담은 정말이지 '실패기'입니다. 혹여나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이렇게만 안 하면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성공한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문화 체험이 목표였으니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냥 외국인 친구 한 명만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 친구를 만들어보기도 전에 먼저 넘어야 할 도전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여학생 학우들이었어요. 제가 합격했던 학교는 차가 없으면 마트에 한번 가기도 어려운 미국 중부의 깡 시골에 있는 고립된 곳이었던지라 한인마트는커녕 한국 음식도 구경하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온전히 영어를 쓰는 곳에 가고 싶었는데, 큰돈을 들여서 몇 개월간 학교에 '수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교실처럼 밀폐되어 있는 공간에서 단체생활을 하다 보면 여학생 네 명 정도 무리를 이루는 학생들의 특성상 그곳에서도 제각기 무리는 형성되었습니다. 몰려다니는 걸 싫어하고 조용히 지내오던 제게는 한국에서는 학교에서는 마음이 맞는 친구 한두 명과만 친해지면 되었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재빨리 집으로(home sweeet home!) 사라질 수 있었는데 웬걸 이곳은 집으로 사라진다고 한들 기숙사에서도 학교에서도 한국인 학우들은 제각기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낯선 문화 속에서 형성된 한국인이라는 카르텔은 어쩐지 숨이 막힐듯한 고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피해 혼자 사색하는 걸 좋아했던 제게 룸메이트들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계속 감시하는 존재들처럼 느껴졌습니다.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으면 옆에 있던 룸메이트가 그러지 말고 나가서 '환타스틱'한 옷을 차려입고 음주가무를 즐겨야 친구를 만들지 않겠냐며 설득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럴 요량으로 온 곳이니 용기를 내서 어울려보겠다고 한국에서는 써보지도 않았던 고데기로 밤새 머리를 말아 파티라는 것에 나서보았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맥주의 힘을 빌려서 서양 친구들에게 엉거주춤 말을 걸어보자니 이 사람들, 내 어눌한 말투를 비웃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멋지고 친절한 외국 주인공은 없었습니다. 그저 빨려 들어 잡아먹힐 것만 같은 눈 색깔을 보면서 그나마 입에 품고 있던 how are u 마저 까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기대와는 달리 최근 재밌는 주제에 대해서 토론하고 대화하기보다는 다소 외설적인 분위기로 심지어 약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고 갔습니다. 멀뚱멀뚱 맥주가 담긴 종이컵만 바라보면서 부끄럽게 벌서듯 서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썰물 빠지듯 조용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들은 여담인데, 그날 파티는 동양인들을 불러서 엉망징창으로 만들었다며, 저를 데리고 간 외국인 친구가 꽤나 창피를 당한 모양입니다. 영어를 못하는 것도 부끄러운데 사교성에서도 낙방이라니. 마음의 문이 삐꺽삐꺽 닫히는 소리가 납니다. 초등학생 때 울면서 괴롭히는 친구들을 피해 숨어 걸었던 그 복도가 생각이 나네요. 그런데, 여기는 와줄 엄마조차도 없습니다. 나는 성인이고, 친구를 만들겠다며 여기에 왔으니까요.


정말 이 감자칩 사 먹어 모으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내 처참한 교환학생의 추억...


그 날 이후로 어떤 파티에 대한 제의가 와도 도무지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인 룸메이트는 꽤나 적응력이 빨라서 새벽에 술에 잔뜩 취해서는 방문을 열어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저한테 'Who are you?' 하면서 들어오는 날이 많았습니다(술주정을 영어로 하다니. 부러운 친구). 물론 나를 불쌍히 여겼던 건지 그 일본인 친구 덕분에 아주 조용하고 친절했던 서양인 학우 하나를 데려와서 같이 일본식 카레를 요리해 먹어본 적도 있습니다. 그게 유일하게 친해졌던 백인 친구이니 목표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려나요. 아무튼 그 고마운 일본인 친구랑은 우습게도 일본어 반 영어 반 하면서 친해졌습니다. 우리 방에 서로의 프링글스 감자칩 통을 종류별로 수집해서 성을 쌓아놓을 만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까 친해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토네이도가 온다는 경보나 마을 내 총기사고로 shut down 된 학교의 기숙사에 같이 갇혀서 이런저런 속마음을 털어내다 보니 우리는 서로 꽤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아, 미국에 온 게 어지간히 실감 나던 그 순간). 그런데 이 아이, 한국인 교환학생 여자아이들 카르텔에서는 평이 좋지 않아요. 원해서 속한 건 아니지만 출신이 한국이니, 나는 그 카르텔에 속해있는 사람인데 한국인 친구들을 등질 수도 없고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와 서도 그룹 카르텔을 만들고 있다니, 모두가 행복한 단체생활이라는 건 그냥 이상에 불과한가 봅니다.

교환학생을 왔는데 남는 게 신기한 과자 사진밖에 없어....

매년 이 학교의 international party에는 Korea section에서 부채춤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이미 꽤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어 온 코스라 부채들과 한복들을 비롯해 모든 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부채춤을 추는 교환학생만이 매년 갱신될 뿐.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인사동에서 전통 손거울이니 전통 비단이니 기념품으로 몇 개 사서 왔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작년 재작년에 왔다 돌아갔던 학생들에게 같은 선물을 꽤 많이 받아서 정작 그런 선물들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제 유일한 백인 친구(?)마저도 손거울이 방안에 쌓여 굴러다니고 있을 정도라면서 한국사람들은 그런 걸 선물하는 게 특성이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선물이라는 명목 하에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알리려고 그들에게 너무 강요하지는 않은 건지 참 아쉬웠습니다. 모두가 획일적으로 똑같이 전통 손거울을 선물하는 아이디어를 준비해 갔다는 것도 씁쓸했습니다. 괜히 단일 민족이 아닌 걸까요? 한국인 친구들은 이번에 있을 축제에서 한국적인 공연을 보여주겠다며 부채춤 연습을 하러 열심히 모였었는데, 따지고 보면 구성인원만 바뀐 상태로 그렇게 한 7년째 같은 춤을 추고 있다고 합니다. 전통 부채춤을 보여주면서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 이렇게나 특별하다는 문화적인 장벽을 각인시킬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이곳의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고 색다른 무언가를 만들 순 없었던 걸까요. 최대한 많은 활동을 해서 다양한 체험을 해봐야 성공한다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었지만, 결국 그 부채춤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로 태평양까지 건너서 방 안에서 뜨개질 시작한 사람입니다.


영어 원문으로 된 책 한 권 읽는 게 로망이었습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천장이 높은 도서관 바닥이 앉아서요. 그렇게 책을 읽고 있으면 건너 책장에 문득 같은 책을 집어 들고 웃으면서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 하나를 우연히 만나는, 그런 순간을 꿈꿨습니다. 도서관에 있다는 international 학생들을 위한 writing 교정 센터에도 몇 번 얼굴을 기웃거렸는데 도와주는 학생들이랑 부끄러워서 제대로 한마디 하는 게 어려웠던 전 thank you만 연신 남발해대면서 도망치듯 자리를 뜨기도 했습니다. 처음 몇 달간 되지도 않는 영어에 사교생활까지 다소 무리하면서 덤벼서 그런 건지 나중에는 열정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학기가 마무리되던 때 제 유일한 생활의 낙은 마을 근교 작은 마트에서 사 오던 한화 약 600원 수준의 자몽 한 덩이와 블루베리 한팩, 그리고 기숙사 방 안에서 보는 미국 드라마가 전부였으니까요. 심지어는 마을의 한 백인 할머님이 운영하던 작은 부티크에서 털실을 1달러에 사 와서 유튜브를 보면서 손뜨개질까지 시작했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미국인들과 이야기는 제대로 못하고 드라마로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훔쳐보는 게 다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어지간히 사회생활을 못하긴 했네요.


그들이 아니라 '내'가 변했어야 하는 거였다.


그래도 어쨌거나 전 소심쟁이에 사교성 제로였지만 적어도 그 한계를 넘어보려 도전은 많이 시도했습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나는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게 서툴다고 깔끔하게 인정하고 양해를 구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영어도 영어였지만 그놈의 자신감 부족과 '너희와 나는 달라.' 마인드가 문제였나 봅니다. 다름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냥 마음을 나누고 싶은 상대방에게 최대한 당신과 나는 닮은 사람이라는 걸 아주 조금만 보여주어도 상대방은 긴장을 풀게 되는 거 같아요. 다른 건 그냥 깔끔하게 인정하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4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얻은 게 있다면, 나와 배경이 많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지 그 요령을 잠시나마 익혀볼 수 있었다는 것이에요. 제가 직장생활에서 만난 동료 팀원들은 전부 어지간히 저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기혼의 남성분들이었거든요. 매일 그들과 같이 점심을 하고 그 대화에 섞여 들려면 일단 내가 가진걸 전부 내려놓고 섞여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단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 관심이 없었던 골프도 정치도 스포츠도 조금씩 알아가려는 노력도 했고요. 물론 알지 못하는 것들도 회사에서는 요령껏 아는 척해야 하는 배짱도 필요했습니다. (덕분에 또래 친구들에게는 ‘갑분싸’도 못 알아듣는 애늙은이로 전락했지만요.) 언어가 다른 외국인들과 친해지는 건 또 다른 영역이겠지만, 큰 맥락에서는 같지 않았을까 합니다. 생각해보면 소개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소개팅을 되돌아보고 남편에게 제 첫인상을 물어보니, 보기와는 달리 꽤 말이 많고 '잘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소심쟁이가 남편에게 이런 평가를 받다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요. 그 당시에는 남편이 하고 있었던 일이 너무 흥미로워서 이것저것 질문을 재잘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때마침 소개팅을 했던 시기가 한창 직장생활에 진하게 녹아들어서 아, 소셜 네트워킹이란 게 이런 거구나 했던 때였거든요. 아무튼간에 이젠 더 이상 집구석에 처박혀서 뜨개질하던 소녀는 없을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 다시 미국에 왔으니까요.



이게 벌써 이곳에 오기 전날 밤부터 비행기 안에서 써 내려간 일 년 전 글이네요. 그래서 나라는 사람은 무엇이 변했을까? 삶의 방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마침내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에요. 24시간이라는 주어진 시간 순간순간에는 도무지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만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고,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또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나는 확실히 변해있습니다. 누군가 빨리 감기를 해서 '너는 이렇게 변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라는 증거라도 보여주면 세상 사는 게 참 쉬울 것 같은데.

외국인 친구요? 네, 교환학생 다녀온 지 어언 육 년은 지난 듯싶은데 이제야 좀 사귀고 있습니다. 말도 많이 텄습니다! 이제는 한국인중에서 제일 영어에 필요한 억양을 잘 구사한다는 칭찬까지 들어봤어요! 육 년 전 교환학생 때를 생각한다면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건 결국 매일 한 문장씩 외우는 회화 공부가 아니라 내 자신감, 마음, 나 자신에 대한 공부가 더 중요했던 모양이에요. 내가 자신 있는 사람이 되니까 그다음부터는 모두들 그냥 친절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영어공부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으면 그냥 이렇게 답합니다.


" 아기였을 때, 한국어 어떻게 배웠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냥 엄마 뱃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을 뿐이야. 계속, 매일매일, 조금씩 듣기만 했어. 지금도 우리는 외국인이 문법에 대해 물어보면 우리도 잘 모르잖아. 하지만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어. 영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냥 매일매일 드라마 한편씩 듣는 거야. 정말 그게 다야. 억지로 머릿속에 넣으려고 하는 건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릴 뿐이야."


" 아,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무리 노력해봤자 시대가 발전하는 속도를 인간은 따라잡기 어렵게 되어 버렸어. 무슨 말인지 알지....? "


그리고 저는 아직, 네, 백수입니다. 결혼만 1년 차 경력단절 여성입니다. 결혼하기 이전의 제 삶은 정말 화려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차려주는 밥 먹으면서 승진을 위해서만 산다면 드라마에 나올법한 그런 외로운 커리어 우먼이 되는 인생을 살 수도 있었죠. 지금은 그림을 그립니다. 영상 편집을 독학해서 채널을 이제 겨우 개설했습니다. 가끔 게임도 하고 있고요. 매일의 저녁거리를 고민해야 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때 밑반찬을 만들고, 청소하는 건 종종 괴롭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받으면서 사는 존재잖아요. 한 가지 직장을 다녔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 있게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주변 사람은 차고 넘쳤습니다.


" 시집 잘 가더니 외국살이하고, 인생 폈네? "

" 편하게 산다. 그게 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 사니까 행복한 거 아냐? "


음,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시집 잘 간 건 맞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심하게 다툰 적 없고 이 사람이랑 못해먹겠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화가 나면 항상 먼저 풀어주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서로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일 년도 안 되는 짧은 연애에 장거리 연애까지 한 결혼치 고는 꽤 성공적이죠? 제 반쪽은 아직 학생입니다. 우리는 같이 성장하는 사람이에요. 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면 할 수 있는 선에서 저는 이 사람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예정입니다. 이 사람과 저는 정말 똑같은, 그런 마음인 거예요. 남녀 역할 구분 짓는다고 남자가 여자의 집안일을 돕지 않는다고, 여자가 남자의 바깥일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그런 논리를 따지기 전에 그냥 서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 있으니 우리 사이에는 조건이고 계약이고 의무고 전부 사라졌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집안일하고 기쁜 마음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런 것들이 쓸데없이 신경 쓰였었지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카더라 경험담들 때문에 평생 결혼을 안 하고 살겠다고 섣부르게 비혼 주의자라는 말을 하고 다닌 제 자신이 정말 부끄러워졌습니다. 뭐든지 삶의 경험이라는 건 닥쳐야 깨닫나 봅니다.




Connecting the dots. 스티브 잡스가 어느 대학 졸업 연설에서 했던 말 같은데, 요즘 정말 그 말의 힘이 무엇인지 무섭도록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보 같았던 교환학생의 쓰라린 실패담도, 도대체 왜 전공했나 싶은 대학 공부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4년간의 직장생활들. 돌이켜보면 인생의 소중한 10년을 그냥 갖다 버린 것 같은데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살고 있는 지금, 그런 것들이 '필요'가 있었다는 걸 느낍니다. 교환학생의 실패는 나 자신을 더 공부하고 용기를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적성이 맞지 않아 쓰레기를 배운 것 같다고 말한 전공 공부와 4년의 직장생활은 사석에서의 내 이야기보따리를 더 맛깔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글 쓰는 것, 그림 그리는 것 그 간의 제 다양하고 작은 취미와 관심사들을 모두 종합해서 세상에 어떤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정말 스티브 잡스가 말한 데로 하고 있었던 혹은 했던 일중에 의미 없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다르게 쓰이는 게 너무나 신기합니다. 반면 무의미한 경쟁은 이 모든 것을 붙여주는 상상력이라는 풀을 희석시킬 뿐이었습니다. 이 전에 썼던 것처럼 세상이 떠들기 좋아하는 그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때로는 너무 다양한 것들에 관심을 두어도 괜찮았던 겁니다. 지금 가진 것들을 더 잘 섞는다면 더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저는 직장은 잃었지만 아직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조금씩 조금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일단은 그중에 하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 쉬운 주제로 계속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누군가 단 한 명의 마음에라도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건 더없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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