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헛똑똑이었다. 마치 잠만 자고 일어나면 눈을 껌뻑거리면서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회사가 나에게 해준 것은?”을 외치며 출근을 하는 배불뚝이 아저씨일 뿐이다. 그저 텔레토비같은 몸을 이끌고 오늘 점심을 과감히 패스하고 빵빵은행에 가기로 하였다. 금융 치료를 받기 위해 인터넷 쇼핑을 신나게 하였지만, 멍청하게도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5번 틀렸기 때문이다. 이 비밀번호라는게, 내 생일인지 전화번호 뒷자리인지 소리지르고 끝난 사이인 전여친과의 사귀기로 한 날짜인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나의 작고 소중한 점심시간을 샤우팅한 그대...아니 빵빵은행에 보내야 한다는 점이 직장인 노비로써 슬펐는데, 이제는 슬픔을 넘어 귀찮고 거슬리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김빵빵이라는 은행원 아저씨는, 다짜고짜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바꾸는 업무보다 신용카드 쓰시나요? 지금 사용하시는 카드 혜택은 알고 계신가요? 기왕 쓰는 카드이면 더욱 좋은 혜택받으셔야죠? 하는 말을 쓰나미처럼 내벹는 게 아닌가. 사실 나에게는 피와 살같은 점심시간을 이렇게 재난경보를 받으면서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서, 듣는 등 마는 등 하였다. 어찌 보면 길 가다가 도를 아시는지요? 천국 함께 가야죠? 너님의 소중한 돈을 우리 불쌍한 실적에 올려주셔야죠? 하는 영업행위를 당하는 귀때기의 폭격, 전쟁 심리와 유사하다.
원래 호환마마같은 신용카드를 아예 안 쓴 것은 아니었다. 월간 한도 40만원이든 50만원이든 쓰면은 분야별로 뭐 5천원이든 얼마든 청구할인을 해 주거나 영점 몇 포인트로 드리는 점은, 그래도 코딱지만하지만 뭔가 연회비 이상을 건지면서 기왕이면 사는 것에 추가로 이벤트 콩고물을 받는다는 느낌에서 나쁘지는 않았다. 또한 연말정산 공제라던지 가끔 뿌리는 쿠폰이라던지 멤버십 할인이나 라운지 무료 이용, 교통카드 할인 등 주로 쓰는 목적만 잘 잡으면 오히려 뭔가 콩코물을 넘어, 적어도 인절미 한 팩은 손에 쥐어주는 정도로 유쾌기도 하였다. 심지어 김빵빵이 같이 태백 밭에서 나온 감자같이 생긴 은행원 아저씨도 막상 모이면 연회비 뽑고 큰 돈을 받을 수 있다고 계산기 열심히 뚜드리면서 보여주니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그러나 언제부턴가 카드를 내 손아귀에 주물럭거릴 때마다, “쉽게 내 피같은 돈을 쓴다”라는 무의식의 행동이 강해졌다. 곳간에서 구휼행위를 하기 위해 전쟁통같은 삶에서 나의 신용으로 귀여운 축제를 하기 위해, 신용카드 “카드 슬래시!” 한 번으로 배달음식이든 명품할부결제든 여행이든 뭐든 마법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심판의 시간, 숨막히는 결제일날 명세서를 보면서, 내 월급 바로 털리고 언제쯤 저축이란 걸 할 수 있는가!를 소리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용카드를 가위로 갈기갈기 찢어갈기지 않았는가. 참을성과 미래감각을 없애는 쉬운 소비란, 나에게 있어 당장의 도파민을 위해 미래의 삶을 깎아내리는 초열 지옥이라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영원히 5회 틀린 비밀번호를 영원히 기억하지 않거나 초기화하지 않고, 체크카드도 없앨지도 고민했었다.
때로는 요즈음의 트랜드인, “예쁜 카드”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던 때도 있었다. 망그러지고 짜부러진 곰탱이들과 도라애몽, 짱구, 텔레토비(거울인가?) 등 각종 귀여운 캐릭터들이 카드에 형형색색으로 프린팅되어, “이걸 써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면 인싸, 최고의 귀염둥이, 우주 최강의 카드매출고객!”이 될 수 있는 입회의 기회를 노리는 경우도 많다. 아니면 각종 프린팅 스티커를 카드에 붙여, 나란 인간은 예술을 구매한다! 하는 모습도 보일 수 있다. 얼마나 개성넘치는 소비 사회인가.
나도 안다. 카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을. 이제는 현금 말고 인간미 없이 모든 것을 터치하고 카드로 시원하게 긁어야 나의 만족을 누릴 수 있는 키오스크라는 게 많다. 또한 앞으로 신용 거래를 통해 신용 등급을 향상하고(물론 카드론이나 현금 서비스는 나락이다.) 우대 금리도 받다 앞으로 인생의 동반자인 대출 거래도 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신용카드 거래도 필요할 것이다. 인터넷 구매든 해외 여행이든 쩔렁쩔렁 동전 매니아가 안 되기 위해서든 카드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애증의 거래처이지 않을까.
그래서 카드라는 군사를 전략적으로 부리는 제갈공명같은 책사가 되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카드의 혜택을 필요할 때마다 월한도와 연회비, 공제 등을 원 단위까지 계산하고 나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가?를 외치는 슈퍼 콤퓨타가 되어야겠다. 또한 카드고릴라 같이 비교 사이트를 통하여 나의 카드가 잘 쓰이는 지 멍청하게 쓰이는지, 그리고 나에게 더 이득이 되는 카드가 무엇인지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겠다. 무엇보다도 카드라는 건 가치 중립적이기에 잘못이 없다. 오히려 내가 너무 쉬운 소비를 하지 않는지 반성하고 평상시에는 “카드를 봉인”하도록 해야겠다. 나의 귀엽고 쪼매난 통장 잔고를 지키고 카드 디자인보다 더욱 화려한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
필요할 때만 카드를 만들어, 빵빵은행의 금쪽이같은 체리피커가 되어서 나의 이득을 쪽쪽 빨아먹어야겠다. 그리고 당분간은 김빵빵이 은행원은 피하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