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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Quo Vadis? (쿼바디스?)

49세 문과출신 N잡러 이야기

by Kay

해고 통보 당일, 제가 할 수 있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링크드인에 구직의 글을 올렸고, 저의 포스팅을 보고 연락을 주신 헤드헌터님과 온라인 미팅까지 했습니다. 이제 의미 없는 저의 자리로 가보니 짧은 재직기간이었지만 제가 주섬주섬 챙겨 온 살림살이들이 눈에 뜨였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있을 공간은 없구나. 짐들은 어떻게 하지?



당장 짐을 어디로 치워야 할지도 전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 직장을 구할 때까지 만이라도 어딘가 노트북을 펼치고 작업할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당장 2주 뒤의 강의 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집에서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저의 해고를 집에 말하기 두려웠습니다. 어찌 보면 직장은 저의 마지막 자존감이었습니다. 명함에 새겨진 회사 이름과 직책은 회사의 규모여부를 떠나서 내가 어딘가 조직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을 나타내주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강한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고로 초라해진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기는 두렵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혼자서 이것저것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카페로 가야 하나? 도서관으로 가야 하나?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습니다. 카페는 단기간에 있기는 적당한 공간이었지만, 하루 종일 일하기에는 제약조건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치안이 좋다고는 하지만 누군가 제 노트북을 훔쳐간다면?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카페 의자는 사무실처럼 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도서관도 물론 좋은 선택지였습니다. 최근에는 노트북 전용 좌석도 있으니 나름 괜찮은 장소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트북 전용 좌석이라고 해도 동영상 강의 수강용이지, 키보드를 이용해서 작업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도서관 복도나 휴게실에서 일할수는 없었습니다.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성문 종합영어에서 보았던 속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아무리 허름해도 집 만한 장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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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할지언정 출근해서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엄청난 차이였습니다. 직장인과 (예비) 프리랜서의 차이였습니다. 물론 지금의 저처럼 공유오피스를 이용하면 나름 괜찮긴 합니다만,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 속에서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약한 연결(Weak tie)로 이어진 한 지인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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