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9. 주말에 한 이별

49세 문과출신 N잡러 이야기

by Kay

해고 통보 첫날 이후, 이미 저는 사무실에서 투명인간이었습니다. 마치 유령 같았습니다. 모두들 저에게 유감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인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일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해온 일들에 대해서 인수인계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리에 나중에 누가 오더라도 그동안 제가 했던 일들이 적어도 쓰임이 있도록 바랐습니다.



컴퓨터에서 그렇게 저의 흔적을 남기면서도, 동시에 저의 흔적을 지웠습니다. 나름 오래 다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개인설정을 많이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저의 흔적을 지우면서 다시 이렇게 회사 컴퓨터에 개인 설정을 하는 날이 찾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개인 살림이었습니다. 업무를 위한 도서와 키보드를 비롯한 개인장비들은 어느새 큰 짐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집으로 가져가기엔 부피도 무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날을 잡아서 차를 끌고 와서 한꺼번에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평일, 다른 직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짐정리를 하고 짐을 들고나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퇴직하는 사람들은 큰 박스를 든 채로 사무실에서 쫓겨납니다. 쫓겨나는 사람의 표정도, 지켜보는 사람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저는 그 감정을 느끼기도, 다른 이들에게도 느끼게 하기 싫었습니다.



kayjagga_56229_a_loosely_sketched_scene_of_a_man_leaving_a_sl_da5efd16-d2ed-48f7-9bf1-5ff3e032a9e7_1.png


주말에 조용히 차를 끌고 와서 저의 짐들을 모두 차로 옮겼습니다. 착잡했습니다. 11년간의 대기업 생활을 청산하고 처음으로 퇴사라는 것을 실행한 그 시절, 11년이라는 기간만큼이나 저의 살림살이는 많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일요일 저녁 혼자 몰래 사무실에 와서 짐을 옮겼던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이직동안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 옮겼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 짐을 옮겨 놓을 곳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습니다. 이 짐을 다시 가져다 놓을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죠. 물론 지인의 사무실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였기에 그곳에는 노트북만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주말에 짐을 옮기고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제 책상의 모든 짐이 사라진 것을 본 동료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이도 동갑인 데다가 친하게 지냈기에 그 동료 역시 착잡했던 것 같습니다.



주말에 짐 다 빼신 거예요? …


그렇게 저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8. 약한 연결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