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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Feb 16. 2019

임희빈(1924~)


96세 백발의 여자가 미용 가운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96세 여자의 등 뒤로 57세 여자가 빗과 가위를 들고 96세 여자의 머리를 이리 저리 휘젓고 있다. 33세의 남자가 이불 속에 누워 두 여자가 연출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날은 저물어 밖은 어둑 어둑하고, 방 안에 있는 형광등 조명 하나가 두 여자를 비추고 있다. 설 연휴, 어느 시골집 풍경이다. 


몇 년 전부터 엄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준다.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에게 미용실까지 가는 길은 점점 멀고 험한 길이 되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직접 가위를 들고 자신의 손재주를 시험해본 날, 엄마도 할머니도 결과에 나름 흡족해하며 웃음지었던 날, 그 날 이후부터 막내딸이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서울에 사는 일일 출장 미용사가 충남 서천군에 사는 할머니 고객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해서 절뚝 절뚝 힘겹게 걷지만 돼지고기 상추 쌈을 직접 싸서 꿀떡 꿀떡 넘길 정도로 소화 기능이 뛰어나다. 눈은 얼마나 밝은지 입 안쪽 살을 물어 뜯는 내 주둥아리 습관을 못보고 지나치는 법 없다. 보는 즉시 버럭 한다. 입을 왜 저런댜.. 그만 뜯어! 또 주방 의자에 앉아 뻐끔 뻐끔 담배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흐트러짐 없는 애연가의 맵시를 보여준다. 담배는 할아버지한테 배웠다는데 그렇게 오래 피우고도 별 탈이 없다. 할아버지를 13년 전에 먼저 보내고도, 혼자서 한결같이 정정하다. 


할머니는 3남 5녀를 낳았다. 쌍둥이 자식 중 한 명은 어렸을 때 죽었고, 나머지 자식들은 잘 커서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재혼도 하는 중간 중간 자식도 잘 낳았다. 자식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으며 할머니의 자손은 세포분열을 하듯 퍼져갔다. 할머니 막내딸은 고등학교때부터 서울로 올라와 살기 시작했다. 언니집에 얹혀 살기도 하고, 남자 동생과 자취를 하기도 하며, 공부 하랴 밥벌이 하랴 힘겹게 서울 살이를 했다. 그러다 을지로에 있는 어느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던 스물 네살 겨울, 인쇄업을 하던 거래처 키 작은 남자 사장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낳은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자란다고 자랐지만 부계 유전자는 아들의 키를 170cm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까지 졸업해서 번듯한 직업은 없지만 이 일, 저 일 하며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살아 간다. 아들은 올해 서른 셋이 되었다.


서른 셋 남자인 내가 할머니와 엄마를 보며 모계 핏줄의 계보를 그려본다. 나의 작은 기원을 탐구하는 놀이이자, 혈연 가족의 작은 역사를 더듬는 작업이 재미있다. 엄마가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한 웅큼씩 쥐어 올려가며 가위질을 할 때마다 백발의 가닥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다. 96년동안 자란 할머니의 머리카락 길이는 얼마나 될까. 머리카락이 자라는 평균 속도(하루 0.03cm)로 계산해도 10m를 훨씬 넘을 것이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지금도 자라고 있고, 할머니가 퍼뜨린 작은 인류의 역사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역사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은근히 감격스럽다. 나를 낳고 기른 엄마가, 엄마를 낳고 기른 엄마의 엄마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장면이 왠지 역사적이다. 미용 가운 사이로 얼굴만 쏘옥 내민 할머니의 표정은 익숙한듯 편안해보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두 손과 무릎을 한 곳에 모은 모습이 다소곳하다. 57세 막내딸이 머리카락을 잘라줄 때 96세 여자는 어떤 기분일까. 무표정한 얼굴 중간 중간 옅은 미소를 지을 때, 할머니는 96년의 기억중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까. 


미용을 끝마치고 57세 여자는 96세 여자의 머리를 손으로 한 번 더 툭툭 털어내고는 가운을 벗긴다. 33세 남자가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며 역사의 현장에 슬쩍 발을 담가본다. 거울을 보는 96세 여자와 57세 여자 둘 다, 이번에도 나쁘지 않군, 하며 흡족한 표정이다. 57세 여자는, 아이고 우리 엄마 이쁘네, 하며 96세 여자 볼을 어루만진다. 에헤헤헤헤, 96세 여자는 멎쩍게 웃으며, 금방 죽을거슬 뭣허러, 하더니 주방에 가서 담배를 한 대 태운다.


뻐끔 뻐끔 연기를 내뿜으며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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