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가슴곰 본 적 있으세요?
얼마 전 남원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데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기사님께 물었다. 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편도 1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지리산 중턱에 있는 펜션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있을 걸요?
아, 쉽게 눈에 띄진 않나봐요.
아마 그런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허허.
환경부는 2002년부터 지리산에 반달가슴곰을 방생해왔다. 서울에서 온 승객도 지리산 인근에 사는 기사님도 반달가슴곰을 본 적은 없지만, 있다니까, 있겠거니 하며 반달가슴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은 개체수가 새끼를 포함해서 60마리가 훌쩍 넘는다고 한다.
택시 차창 밖으로 우거진 지리산 숲을 바라보는데 KM-53이 떠올랐다. KM-53은 끊임없이 지리산을 탈출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떠돌아다니는, 역마살 낀 반달가슴곰으로 유명하다. (KM-53으로 불리는 그를 여기선 임의로 오삼씨라고 부르겠다.)
오삼씨는 2015년 1월에 태어나 그 해 10월 지리산에 방사되었고, 2017년부터 신출귀몰한 도주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처음으로 집(지리산)을 탈출했을 땐 90km 떨어진 김천 수도산에서 검거된다. 다른 반달가슴곰의 활동 반경이 15km 이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결국 집(지리산)으로 잡혀오지만 일주일을 못 버티고 다시 수도산으로 도주한다. 도주하고, 잡혀오고, 도주하다, 잡혀오고, 또 다시 도주하길 반복한다. 세번째 도주 중에는 버스에 치이는 사고까지 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이동해서 20km 떨어진 태봉산에서 발견된다.
지칠 줄 모르고 집을 떠나 어딘가로 향하는 오삼씨. 부상을 당해도 집 생각은 하지 않는 오삼씨. 오삼씨의 불굴의 의지에 당국은 두 손을 들었고, 결국 그는 지리산이 아닌 수도산에 방사됐다는 소식. 오삼씨가 승리했고, 나는 꽤 지난 소식에도 왠지 모르게 안도했다.
택시는 펜션에 무사히 도착했다. 동행한 여섯 명의 친구들과 낮에는 계곡에서 수달처럼 물놀이를 했고, 밤에는 질문카드를 이용해서 대화를 나눴다. 각기 다른 질문이 적혀 있는 여러장의 카드 중에 하나를 무작위로 뽑아 답하는 식이었다. 내가 뽑은 카드에 적힌 질문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이었다. 나는 어려움 없이 독립(or 탈출? 도주? 출가?)이라고 말했다.
스물 여덟에 부모님 집에서 나왔다. 오삼씨처럼 나를 검거하거나 포획하는 세력은 없었으니, 의식주만 스스로 잘 해결하면 되었다. 고시원 한달치 월세만 들고 나와 노트북과 카메라를 IT 전당포에 맞겨 초기 생활비를 마련했다. 집을 나온 이유는 '진로 문제로 인한 부모님과의 갈등'때문이라고 말했으나, 정말 그 이유 뿐이었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도 각자 경험한 탈출과 도주의 기억을 떠올렸다. 부모님의 정신적 압박(혹은 핍박?)에 짐 싸들고 200km 이상 이동하여(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온 친구, 대학과 진로에 대한 회의감으로 자퇴를 감행하고, 자퇴한 김에 집까지 나온 친구, 지금은 부모님과 같이 살지만 이전에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1년 동안 집을 떠나 있었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독립을 꿈꾸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자리엔 없었지만 한국의 모난 돌 차별 문화로 힘들어 하다가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찾아 외국으로 떠난 바이섹슈얼(bisexual) 친구도 생각났다.
각자 집을 떠난 이유는 비슷하면서도 달랐고, 훌쩍 떠나는 순간의 후련함과 막연함, 설렘과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시 오삼씨를 떠올리며, 그가 계속해서 지리산을 떠나 수도산으로 향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야생개체 증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분산, 영역확장 차원의 활동, 암컷 찾기 등의 추측들이 있지만, 개체수에 비해 지리산은 좁지 않고, 오삼씨는 정착하지 않고 계속 이동중이며, 지리산 안에도 암컷이 많기 때문에 열거한 추측들은 설득력이 낮다는, 국립공원생물종보전원 관계자의 말을 연합뉴스 기사에서 보았다.
같은 기사에 흥미로운 소식도 있었다. 작년에는 오삼씨가 수도산에서 90km 떨어진 경북 구미 금오산 일대에서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30-40km 떨어진 영동에서 발견됐다는 소식. 그걸 보며 오삼씨가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건 정해진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 아닌 어딘가로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어떤 본능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본능을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 '호기심'이라고 단정지어본다. 내가 집을 나온 것도, 사실 그 이유가 더 컸을지도 모른다. 집 밖의 삶에 대한 호기심! 어쩐지, 대책 없이 나왔는데도 그렇게 웃음이 나고 두근거리더라니.
한 곳에 정착해서 쌓아올리는 안정감도 좋지만, 훌훌 털고 어딘가로 떠날 때의 쾌감, 설렘, 자유로움에 더 끌리는 존재들. 노스텔지어를 미래로 투사하며 성공과 실패 너머로 향하는, 디아스포라적 존재들을 보면 항상 두근거린다. 그것이 내가 집 떠나는 존재들을 연민하기보다, 애정하고 옹호하는 이유일 것이다.
ps. 오삼씨가 인스타그램 하면 참 좋을텐데. #오삼씨 #반달가슴곰스타그램 #벌꿀먹방
2020. 8. 26. 성광일보(http://www.sgilb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