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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희 Nov 07. 2023

키보드에 정말 사이다를 뿌릴까?

데스크탑과 노트북을 함께 쓰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노트북만 쓰게 됐다. 그때 한창 초경량으로 자랑하던 LG 울트라북 13인치였다. 노트북을 매번 들고 다녀야 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뚜벅이인 입장에서는 큰 인치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선택했다.


어쨌든 나름 잘 쓰고 다녔는데 이 노트북의 단점이 키판의 열이 어마무시하다는 거였다. 이전에 썼던 노트북들은 무거운 대신 (덕분에 6개월 들고 다니다가 손목 인대 늘어나서 치료 받음) 두꺼웠던 터라 노트북을 장시간 사용해도 손가락 뜨거운 줄 몰랐는데, 키판이 얇아진 만큼 1시간 정도만 써도 손가락이 따끔따끔 했다. 맨 처음에는 내 몸의 문제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노트북 문제인 걸 알고 AS센터에도 찾아갔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해서 냉각팬 돌아가는 노트북 전용 접이식 책상도 사고 별 짓 다 했는데, 결국 선택한 건 키보드 연결해서 쓰자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쓸 때에는 어쩔 수 없지만 집에서 쓸 때만이라도 뜨겁지 않게 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유선 키보드를 연결함으로써 손가락 뜨거움에서 해방되었다.


지금은 노트북을 바꿔서 사진에서 보듯  LG 그램 15.6인치 쓰고 있다


그러다가 유선 키보드가 너무 거추장스럽고, 책상이 깔끔하지 않아서 그냥 인터넷에서 아이리버 무선 키보드 마우스 세트를 주문했다. 이걸 주문할 때 스펙 따윈 전혀 보지 않고, 흰색이면서 무선이면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이거 살 당시 2만 원 초반대로 가격도 적정하다 싶어서 구매했다.


사실 반품하고 싶긴 했었다. 원래 쓰던 유선 키보드보다 살짝 작아서 초반에 오타가 자주 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짜증이 확 났는데 참고 썼다.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나아지리란 맘이었고, 실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키보드가 지금 크기보다 좀 더 크면 좋겠다고 생각은 한다.


어쨌든 책상 환경이 훨씬 깔끔하고 쾌적해졌다. 그리고 나는 애초에 키보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마우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냥 키보드는 잘 쳐지면 그만인 것이었고, 디자인도 어차피 그게 그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키보드에 돈 쓰는 것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전에 쓰던 유선 키보드는 만 원짜리였다)


그러다가 유튜브에서 우연하게 기계식 키보드 영상이 도대체 어떤 알고리즘인지는 모르겠으나 떠서 보게 되었는데, 신세계더라. 그러면서 지금 쓰고 있는 이 키보드에 초반에 가졌던 반품의 욕구와 여전히 키보드는 좀 더 컸으면 한다는 욕구가 휘몰아치면서, '이제 나도 키보드는 기계식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욕망이 분출했다. 타이핑 할 때 나도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고 강렬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더 불지피게 된 것이 바로 키보드 자판 글씨가 흐려진 것이었다. 이미 3년을 쓰고 있어서 자판 글씨가 흐려진 상태였는데, 기계식 키보드가 눈에 들어오니 살짝 거슬리던 그 부분이 큰 흠결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기계식 키보드를 전투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고, 매일 유튜브 영상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단가가 좀 나가는 것을 보고서 처음엔 살짝 흠칫 했으나 이미 기계식 키보드에 매료된 상태이므로 '까짓껏 20만 원 정도야!! 더 비싼 것도 많은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로 마인드가 바뀌었다. 사람이 맘에 들면 눈이 뒤집어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문제는 이렇게 된 지가 오래 됐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기계식 키보드는 사지도 못하고, 이 아이리버 키보드를 계속해서 쓰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이 키보드가 고장이 안 난다. 나는 성향상 고장이 안 났는데 굳이 바꾸는 주의는 또 아닌 터라 이 키보드가 고장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도저히 안 고장난다.


엄마는 기계식 키보드에 반년 째 안달복달하는 걸 보면서 "그냥 사! 그렇게 사고 싶음 사야지~!"라고 하시지만, 내 입장에선 그게 안 된다. 물론 내 맘에 드는 걸 쓰는 걸로 내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은 알고 있는데, 마음 끝자락에 있는 '고장도 안 난 걸 버리고 새 기계식 키보드를 쓰는 건 자원낭비와 환경오염이다'라는 이 가치관이 도저히 놓아지질 않는다.




이런 나를 보니 고등학교 때 친구한테 들었던 일이 기억났다. 핸드폰을 바꾸고 싶은데 부모님이 고장나기 전까지는 바꿔주지 않는다는 말에 핸드폰을 고장내기 위해서 고군분투 한 이야기가 말이다. 5층 계단에서 떼굴떼굴 굴려보고, 높은 위치에서도 수직 낙하시켜 보고, 던져도 보고 했는데 그 핸드폰은 정말 징하게 고장이 안 나고, 오히려 기스만 더 생겨서 지저분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핸드폰을 바꾸고 싶었던 그 욕망은 핸드폰을 사이다가 담긴 컵에 수장시킴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졌다.


나는 사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그랬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고 넘어갔지만, 속으로는 '핸드폰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해?' 하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핸드폰에 딱히 뭐가 없었던 나로는 고장도 안 난 걸 왜 바꾸고 싶어 하나 싶었다. 사이다에 수장된 핸드폰에 오히려 더 맘이 갔다. 그런데 이제는 그 친구의 맘을 이해한다. 십분 이해한다. 사람이란 자고로 자기가 겪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인 것이다.


기계식 키보드로 이렇게나 바꾸고 싶은데, 정말 사이다를 뿌려야 할까? 그러면 되려나... 그러나 기계식 키보드는 여전히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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