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서는 것도 용기이다

뒷모습이 아름다우려면 언제 가야 할까?

by 가릉빈가

아주 오래 전, 10년도 더 넘은 듯도 한데 결혼식 주례만 수 백 번 본 분이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것이다. '아니다 싶으면 식장에서라도 돌아서야 한다.'


실로 자신이 주례를 보고 있는데 신부나 신랑 측에서 이 결혼 못하겠다며 파투내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 황당하고 당황스럽지만 그게 굳이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식장에 들어가면 끝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때라도 돌아서야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창피함이나 그런 건 잠깐이고, 앞으로 살 날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이혼보단 파혼이다.


내 주변에서도 그렇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결혼준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자잘한 불협화음들이 각양각색으로 발생하는데 정말 제 3자가 보기에 아니올시다 싶은 것들이 눈에 띌 때가 있다. 근데 대부분 제 3자가 보기에도 이 결혼은 진짜 하면 안 되겠다고 느낄 정도면 결혼준비하는 당사자도 대체적으로 다 느끼고는 있더라. 이 결혼이 맞는지 모르겠다며 여기서 멈춰야 하는 게 아닌가 당사자도 헷갈려 하는데 사실 말이 이혼보단 파혼이지 실상 행동하기가 쉬운가. 이미 청첩장은 다 뿌려 온 동네방네에 소문은 다 났으니 주변 사람들의 이목, 파혼했을 때의 무수한 뒷말과 그에 따른 금전적 손해, 별 것도 아닌 문제를 크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 무엇보다도 아직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남아있는 사랑이 식장 앞에서 부부 선언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뒤의 결말은 어차피 각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비단 결혼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다. 이병기 역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주옥 같은 시구를 남겼다. 나는 이 시를 알고 난 이후부터는 나는 언제 떠나야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떠나는 시기를 염두에 뒀다. 나는 정말 아름답게 떠나고 싶다. 문제는 그게 언제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설프게 떠나는 바람에 미련과 후회로 점철된 적도 있었고, 애매하게 떠나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뒤돌아가는 시기를 정말 놓치면 답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반드시 가야할 때에는 조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산업재해로 인해 중상자가 1명 나올 경우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원인으로 경미한 사고를 겪었던 사람이 300명 즉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경고성 징후와 전조는 반드시 존재했고, 그것을 무시한 결과다.


나 역시 가야할 때를 놓치는 바람에 방황의 현장에 놓여있다. 아니다 느꼈지만 그것을 놓기는 쉽지 않았다. 이미 경고성 징후와 전조는 충분했다. 나는 번아웃이 올대로 왔었고, 더 이상의 의미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 길은 아니라고. 나는 분명하게 인지했다. 이건 아니다. 나의 선택은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돌아서야만 하는 그 시기에 거짓말 않고 석 달 열흘을 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했단 건 첫째, 매몰비용이다. 내가 지금껏 일구어 놓은 것들, 투자한 시간과 돈은 지금 포기해 버리면 어떤 짓을 하더라도 환수가 안 되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냥 낭비하고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매몰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것이 아님을 알지만 너무 많이 와 버린 상태에서 한 번에 미련없이 모두 다 쓰레기통에 처박기는 그 부피도 무게도 너무 크고 무거웠다.


둘째, 사람들의 시선과 만류였다. 의미가 있든 없든, 열정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나는 이것을 해 오면서 얻은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결국 용두사미가 됐다란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조차도 버겁게 느껴질 정도일 때가 되니 좀 더 현명한 판단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대부분의 답은 비슷했다. 다 너와 같은 생각으로 이 길을 걸었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 모두 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잘만 해 왔다, 잠깐이다, 그 당연한 고민에 연연해하지 마라. 무엇보다도 내가 좀 더 참아보자고 했던 것은 이 조언 때문이었다. '네가 이 수준에서 그만 두면 앞으로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하지만 네가 이걸 참고 해낸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더 늘어나게 되고, 더 넓어지고, 더 달라질 거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져. 그런 걸 생각해 봐.'


셋째,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갖는 것이 두려웠다. 매몰비용도 주변의 시선보다도 가장 가혹하게 다가온 건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됐나, 남들 다 힘들어 하고 어려워하면서도 이겨내고 있는데 유달리 나는 왜 이럴까, 여기서 중도하차라니, 결국 끝을 보지 못하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도 못하건만... 이런 생각에 나를 무수히 괴롭혔다.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데 썰다가 말아버린다는 것 자체가 내 자존심이 용납이 안 된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서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던 경고들을 모두 다 무시했다. 돌아가는 것을 멈추고 직진하기로 맘을 먹으니 그 경고들은 어느새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결국 끝을 내기는 했다. 덕분에 얻은 것이 있었고, 조언처럼 끝을 맺으니 할 수 있는 것도 달라졌다. 위치도 새로워졌다. 문제는 거기까지였단 것이다. 그나마 그때는 아무 의미가 없고, 열정도 없고, 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력이 하나도 없었지만 '끝을 맺는다' 혹은 '끝을 맺어야만 한다'는 집념이 날 끌고 올라갔지만, 끝을 맺은 이상 더 무언가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확살하게 이젠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걸. 이 끝맺음이 나에게 족쇄가 되어서 나아갈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걸, 그리고 그것을 만든 장본인이 누구도 아닌 나란 사실에 절망했다. 나는 가야할 때를 알지 못하여 추한 앞모습만을 남기게 됐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 없이 도전하는 자는 멋지다. 하지만 아니다 싶을 땐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자는 용기 있는 자이다. 어느 쪽이든 박수 받기 충분하다. 나는 그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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