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는 24절기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고대하고 사무치게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동지(冬至)이다. 이 동지의 특징은 한 해에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것이다. 긴긴 밤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 되겠다.
밤과 새벽을 좋아하지만, 그 길이는 짧기를 바라는 나의 이중적인 마음은, 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겨울이 깊어갈수록 마음 한 구석은 시리기 시작한다. 그러하다 보니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되는 절기가 바로 동지일 수밖에 없다. 동지의 긴 밤을 넘기면 해는 어느 순간부터 빠르게 길어진다. 그러면 나의 마음도 길어지는 낮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도 구김살 없이 펴져간다.
그리고 동지가 유달리 나에게 각인이 된 것은 바로 황진이 때문이기도 하다. 개경의 기녀로 용모가 출중하고, 시서 음률에 뛰어났고, 여류시인으로 평가 받는 그인데, 사실 처음부터 황진이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 국어시간에 시조 배울 때 항상 나오는 존재일 뿐이고, 기녀치고 시서에 능한 존재라고 타인이 평가해주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험을 위하여 그의 시조를 외우는 것이 전부였고, 학생 때에는 그가 시조를 잘 썼다고 국어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매스컴에서도 떠들어댔지만 그에 대해서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어느 부분에서 잘 썼는지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는 법인지라 정말 동지도 아닌 뜬금 없이 멍하니 있을 때 순간 "황진이가 시조를 정말 잘 썼구나!"하고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다. 황진이에 대한 호불호와 관계없이 학생 때 시험을 위해서 외웠던 시조는 성인이 되어서도 말끔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시가 정말 잘 썼구나 싶었다. 그게 바로 황진이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동짓달 기나긴 밤>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가 시조를 잘 쓴다는 걸 깨닫자마자 이 시에 대해서 정말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황진이는 기녀이고, 오로지 하나의 정인만을 위해 있을 수는 없는 존재이지 아니한가. 그러하다 보니 하룻밤의 정인으로 남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정인이 너무 좋아서 오래 있고 싶은데 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야속하리 만큼 자신의 품을 떠나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정인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마음 한 켠에 그 그리움을 갖고 살리라. 그러하다가 그 보고픈 정인이 다시 황진이를 찾게 된다면 오래도록 그 정인과 함께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 마음을 긴 동짓날의 밤을 베어서 잘 보관하고 있다가 다시 정인이 오는 그날 밤에 베어냈던 동지의 긴 밤을 이어붙여서 오래도록 있고 싶다고 하는 열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표현이 너무 기막히지 아니한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우리도 물론 행복한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있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동짓날 밤의 허리를 베어낸다는 표현은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표현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확 다가와 아로새겨진다. 황진이의 간절함은 베어낼 수 없는 동짓날의 밤조차도 얼마든지 베게 만든다.
내가 만약 이 시조에서 나오는 어른님이라면 황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워보였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냥 그 기방에 눌러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선비들이 황진이의 재능을 아꼈고, 황진이가 묻힌 무덤에 절까지 했다는 그 이야기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납득이 된다. 여인으로서만 아니라 한 명의 문인으로서 손색이 없다.
나와 황진이가 느끼는 동지는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차 우리는 동지라는 그 절기가 기다림과 소망의 날인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곧 다가와 길어질 낮에 대한 희망을 품고, 황진이는 정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리고 각자 이 애뜻한 기나긴 동지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