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갔다. 코로나19와 방역패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시장엔 사람이 많았다. 예전에 비해서 줄어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시장의 그 좁은 통로엔 여전히 가득 차 있다. 누군가가 내 발을 밟아 화들짝 놀라며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는데, 몇 분 후에는 내가 다른 사람의 발을 밟아 화들짝 놀라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서로의 발을 밟고 밟히면서 지나갈 만큼 여전히 혼잡한 곳이다.
그 시장에는 쇼핑몰도 함께 있는데, 잠깐 볼 일이 있어 들어갔다.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린다. 거기서 새와 물고기, 햄스터 등을 팔고 있었다. 조그마한 새장 속에서 노랑색과 주황색이 섞여 있는 종류는 모르지만 예쁜 새 두 마리가 지지배배 노래를 불렀다. 근데 그걸 보고서 안타깝고 불쌍했다. 솔직히 말하면 '학대'란 단어가 떠올랐다.
코로나 19가 발생하면서 사람들의 발이 묶였다. 쉽게도 갔던 외국여행은 너무 멀어졌고, 국내여행조차도 눈치가 보인다. 먼 나라 인도는 아예 셧다운제까지 실시했던 적도 있다. 출퇴근이 당연하던 시절에서 재택근무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로 바뀌어 간다. 택배업이나 배달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시대다. 나가지 못하니 모두들 주문하여 집에서 물건을 받고, 음식을 먹는다.
사람들은 이제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는 목소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다.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발을 묶어둘 셈이냐고 묻고 있다. 다들 답답하고 짜증나며 우울하다고 토로한다.
사람이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내가 먹기 싫을 때는 괜찮은데, 다이어트를 해야 해서 먹지 못할 때는 더욱 먹고 싶은 것처럼, 내 의지로 집에 가만히 있는 건 편안함과 안락함을 선사하지만, 타인의 강요로 집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건 억압이고, 족쇄이다.
저 새장의 새라고 다를까. 새의 본능은 나는 것이다. 그 조그마한 새장에서 폭이 50센티나 될까 말까한 그 좁은 공간에서 그래도 새라고 날개짓을 퍼덕여 날아다닌다. 고작 두세 번의 날개짓으로 끝나는 그 작은 공간에서도 나름 날개짓을 해서 본인이 새임을 계속해서 자각하고, 사람들에게 내보인다.
생명체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본능이고,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생존권도 같이 박탈당한다.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금 저 새장 안에 갇혀 있는 새나 코로나19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사람이나 새나 제 뜻대로 하지 못하는 건 모두 다 고통스러운 법이다.
그런 걸 이제 뻔히 잘 아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저 새를 날개짓 두세 번이면 끝나는 좁은 공간에 가두어 두고, 그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예쁘다고 해 준다. 새는 천공을 가른다. 어쩌면 지금 코로나 19로 발이 묶인 사람보다 더 답답하고 절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한시라도 빨리 저 새에게도 좋은 주인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저 새장에서 잠시라도 탈출하여 좀 더 넓은 곳에서 날개짓 하길 바란다. 우리가 이 코로나19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넓히려고 머리를 쓰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