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거들 뿐
독서 = 남미에 있는 이과수 폭포.
독서 모임 = 폭포를 가까이 보기 위해 타는 유람선.
무슨 비유가 이렇게 어설프냐 하겠지만 나에겐 남미 여행과 독서 모임 모두 현실성 제로인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상상속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안타깝게 남미 여행기는 아니다.
그보다 더 좋은(!) 독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연히 모집 글을 보았고 귀신에 흘린듯 신청 댓글을 달았다. 처음엔 분위기만 보고 결정하자, 라는 비겁한 마음으로 신청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고 모임에 참여한다. 심지어 3개씩이나.
할 일이 그렇게 없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혹은 루저들의 모임이라고 비하할 수도 있다.(내가 그랬다) 예전의 나라면 충분히 나올 법한 반응이다. 세상에 즐길 일이 얼마나 많은데 독서모임이라니. 데이트 하기도 벅찬데, 주말에는 낮잠도 자야 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최신 예능과 영화까지- 시간이 부족하다. 백번 양보해 혼자 책을 읽는 것은 이해한다 쳐도, 다른 사람과 만나 책 이야기를 하는 '짓'은 정말 시간 아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혼자 읽는 것과 여럿이서 책 이야기를 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얼떨결에 신청했던 생애 첫 독서모임을 통해 왜 그렇게 많은 독서모임이 생겨나고 유지되는지 알았다. 그리고 2개의 모임에 추가로 참여했다.
이과수 폭포의 웅장함을 만끽하기 위해 3개 국경에서 유람선을 타고 모여든다. 같은 이과수 폭포이지만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서 어떤 각도로 어느 흐름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책도 마찬가지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읽냐에 따라 한권의 책이 열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각 나라의 유람선, 내가 속한 3개의 독서모임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준비사항 : ★★★★
당일 부담감 : ★★
모임 기대감 : ★★★★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전통적인 독서 모임 방식이다.
6명이 돌아가며 발제자가 된다. 발제자가 읽고 싶은 책과 장소를 선정하고 모임 한 주 전까지 발제문(질문)을 카페에 올린다. 나머지 인원은 모임 전날까지 책을 읽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올린다.
모이는 시각은 한달에 한번 토요일 오전. 카페에 모여 1시간 정도 근황을 나눈 후 발제문에 적힌 질문에 맞춰 한 명씩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한다.
내가 이 모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젊은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린 친구는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이고 졸업을 앞둔 대학원생도 있다. 이제 막 취직한 신입사원,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프리터족을 선언한 동갑내기 친구까지 사회적 신분도 다양하다. 연령대는 20대 중,후반부터 35세인데 20대 비중이 많기에 참석자들의 사고와 이야기가 말랑말랑하다.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기획자로서,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특히 아직 사회에 물들지 않은 대학생들의 신선한 시각과 관심사 그리고 책을 통한 그들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들을 수 있기에 3시간 동안 귀를 쫑긋 세우고 필기를 한다.
삶이 다양한 만큼 읽는 책도 분야가 넓다. 읽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고전이나 인문학 서적도 있고 취향따라 소설, 에세이 등 분야를 막론한다. 역사와는 평생 담을 쌓고 살았는데 '광해군'이라는 표지가 씨뻘건 책을 읽었고(그런데 재밌다), 왜 읽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유홍준의 '나의 문화 여행 답사기'를 읽었다. (답사기 덕분에 오대산 월정사 대나무숲길을 감탄하며 걸었다는 사실은 뒤늦은 깨달음이다)
책을 다 읽고 발제문까지 적어햐 하는 부담감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독서모임을 신청하고 중도 탈락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발제문의 난이도가 높지 않아 큰 어려움 없이 참여할 수 있다.
준비사항 : ★
당일 부담감 : ★★★★
모임 기대감 : ★★★★★
가장 독특한 독서모임 방식이다. 이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특이하다.
투표로 이달의 책과 모임 일정을 정한다. 더 이상의 준비는 필요 없다. 가뿐한 마음으로 노트와 필기구, 그리고 빳빳한 새 책을 준비하여 모임에 참석한다.
준비가 가볍다고 해서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 모임의 키 포인트는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한 개의 책 쪼개 읽기다. 내 파트를 정확히 읽고 전달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파트도 경청해야 그 날의 책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다.
방식은 다음과 같다. 조장의 능숙한 진행으로 간단히 자기 소개와 최근 관심사를 나눈다. 이어서 3분 동안 책을 가볍게 살펴보고 2분 동안 첫 느낌을 이야기 한다. (3분 + 2분 x6명 = 15분) 책에 대한 기대 또는 얻고 싶은 답 같은걸 주로 나눈다.
본격적으로 인원에 맞춰 책을 n등분하고 돌아가며 읽는다. 보통은 2회전 정도이며 분량이 많을 때는 3회전 정도다. 9분 동안 할당된 파트를 읽고 3분 동안 돌아가며 자신이 읽은 파트를 소개한다.(9분 + 3분 x6명 = 27분, 2turn = 54분)
9분이 짧아 보이는데, 정말 짧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정해진 분량을 반도 읽지 못할 정도로 시간 순삭이다. 잔잔한 음악 소리에 책 넘기는 소리가 가미되어 집중력을 높인다. 행여나 다 읽지 못하면 어쩌지 싶은 부담감에 벼락치기 공부를 하듯, 보고서를 리뷰하듯 정신을 바짝 차리며 책을 본다.
이어서 각자 읽은 파트를 이야기한다. 주로 30대 직장인들이 모인 탓에 인생과 책에 관한 밀도있는 대화가 오고간다. 발화시간을 2분, 3분과 같이 설정해 시간 관리가 철저하다. 말이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주도할 상황도, 말이 적은 사람이 아무 말 하지 않을 걱정도 없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본인이 느낀 것을 쏟아내면 된다.
2시간 안쪽으로 책 1권과 참석자들의 생각까지 읽어내는 파워풀함.
주말 아침, 짧은 시간동안 뇌를 힘껏 짜내서 폭발시키고 난 개운함.
마라톤 원주를 하고 헐떡거리며 주저 않을 때 느끼는 행복한 소진처럼, 이 독서 모임에 대한 기대감과 만족감은 최고다.
준비사항 : ★
당일 부담감 : ★★
모임 기대감 : ★★★★
새롭게 시작한 독서모임. 이미 2개의 모임을 하면서도 굳이 새로 시작한 이유가 '적은 부담감'이라고 할 정도로, 가벼운 독서모임이다. 단, 부담감은 접어 두되 아침 일찍 일어나야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2주에 한 번 카페에 모여 1시간 동안 책을 읽는다. 책 말고는 준비할게 없다. 지금 읽는 책만 들고(어차피 출근 가방에 들어있으니) 모임 장소에 앉아 책을 읽는다.
1시간 동안 책만 읽는게 새삼 새로운 경험이다. 농구 하이라이트 보랴, 아내 사진 찍어주랴, 밀린 카톡 읽느라 흐름이 많이 끊긴다. 하지만 아침 독서의 장점은 마음 먹고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30분 동안 참여자들 각자 읽은 책을 소개한다.
7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깨닫는게 있다면, 아침 시간이 골든 타임이라는 점.
공부를 하든 취미를 배우든 저녁 시간은 가변적이다. 당일날 회식이 잡힐 수도 있고 빡센 업무로 지칠 수도 있다.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내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아침, 출근 전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모임 시간은 출근 전 아침 7시다. 준비 시간까지 합치면 6시에 일어나는 강행군 이지만, 광화문 S 커피 전문점의 잔잔한 음악과 모닝 아메리카노, 화창한 날씨까지 더해지면 피곤이 싹 가신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나와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이 있을까 싶다.
더욱이 정해진 규칙도, 룰도 없다. 모임에 늦어서 벌금을 낼 필요도, 늦게 참석해서 다른 참여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다. 정말 있는 그대로 '독서' 가 가장 기본이 되는 자발적인 모임인 것이다.
그 1시간의 오롯함을 사람들이 열망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고생과 회사 동선이 바뀌는 수고로움, 버스비가 한번 더 추가되는 금전적 손실에도 참여 인원이 벌써 15명에 다다른다.(아직 모든 사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읽은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지만 나누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지 않기에 장점이 단점을 커버한다.
짧은 나눔이지만 책을 통해 교집합이 없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엿보고, 책을 소개하는 말을 통해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경험한다. 출근 동선을 바꾸면서까지 독서 모임에 모인다는 것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터, 각자 선택한 책들 속에 인생의 노하우를 엿볼 수 있어 재미가 더해진다. 그만큼 나와 내가 읽은 책을 돌아보게 되고, 모인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공유하고 추천하고 싶은 마음은 덤이다.
이제는 남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