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은 건 분명 건강한 태아의 심장 소리였다. 클럽에 온 듯 빠르고 강렬하게 쿵쾅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진료실에 울렸다. 난생처음 심장 소리를 스피커로 듣는 신기함과 그게 내 새끼의 심장 소리라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우리는 둘 다 넋이 나갔다.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무뚝뚝하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도 미소로 축하를 건넸다. 드디어 나도 어른이 된 것 같았고, 길에서 만나는 아기와 부모를 볼 때마다 그들의 모습에 우리의 미래를 투영하며 즐거웠다.
그렇게 행복했던 4월 봄날,
장모님과 정기 검진을 갔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 말 없이 흐느끼던아내. 정적이 흐르는 순간, 내 심장이 '철렁' 하고 가라앉았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온 몸에 피가 돌아 얼굴은 터질 듯이 빨개졌고 머리와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겉으로는 침착하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으나 손과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왜,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나는 다그쳤고 아내는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얼마 동안 흐느꼈다.
마침 점심시간 즈음이어서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회의실, 벽에 붙은 긴 의자에 기대어 밀물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껴안고 펑펑 울었다. 사람이 없으니 더 외롭고 슬펐다.광화문 한복판, 수만 명이 모여있는 빌딩 사이에서 거짓말처럼 나 혼자 있었고 나 홀로 흐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는 급기야 현실을 부정했다. 내 심장보다 빨리 뛰던 태아의 심장이 왜 갑자기 멈춰 선 걸까. 혹시나 심장은 제대로 뛰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의사 선생님이 잘못 검진했을 수도 있고 초음파 기계가 낙후돼 잠깐 멈추는 사례는 없을지, 갖가지 경우의 수를 상상하며 병원 탓을 찾으려 했다. 말도 안 되는 오진(誤診)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그 사례가 이번만큼은 나에게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꼭 쥐었다. 손에 땀이 나도록. 다른 소식을 기다리며. 그러나 더 이상 아내에게 전화는 오지 않았다.
유산은 크게 자연 유산과 인공 유산(낙태)이 있다. 자연 유산을 그 시기와 자궁 경부(입구)의 상태에 따라 분류하는데, 아내는 '계류 유산'에 해당됐다. 수정 후 착상은 되었으나 20주 이내에 자궁 안에서 더 이상 크지 못하고 성장이 멈춘 상태. 즉, 외부 출혈이나 파열 없이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발생한 거다. 아무런 증상 없이.
어떠한 증상도 없이 갑자기 유산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황당했는데, 더 놀라운 점은 임신 중 20% 이상이 자연 유산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5명이 임신하면 1명이 '자연스럽게' 유산을 경험하다니, 믿기는가...? 아무리 임신에 대해 무지했다지만 1/5 확률로 유산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여러 형태의 유산과 상실감을겪고 있다는 뜻일까.(심지어 유산을 3번 이상 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경우 습관성 유산으로 진단을 받는다.)
실제로 20%는 수치일 뿐이었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당시 내가 속한 팀의 80%(나를 제외하고 5명 중 4명)가 유산 경험이 있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배들은 짜기라도 한 듯 나와 둘만 있는 상황이 되자 힘내라며 지난 기억을 천천히 꺼냈다. 지금은 어엿한 중학생인 외동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준 팀장님, 유치원생인 둘째를 갖기 바로 전에 아내가 유산을 해서 둘째 고민을 많이 했다는 과장님, 마치 자신이 다녀온 군대를 회상하듯 각자의 삶에 돌멩이처럼 박혀 있는 조각을 빼어 나에게 보여줬다. 이들뿐일까. 소식을 건네 듣고 용기 내어 먼저 연락을 주는 지인들도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고,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놀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기력했다. 원인이라도 알고 싶어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봤지만 답변은 간단했다. 염색체 이상. 아내가 무리를 해서도, 착상이 잘못된 것도 아니며 특별한 원인이 있었던 게 아니란다. 처음부터 잘 크지 못할 염색체가 만나 자라다가 멈춘 것이라는 것. 만약 임신 주차가 더 지났더라면 태아가 큰 상태에서 유산이 되거나 아픈 상태로 자라 산모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기에 오히려 잘된 거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들었다. 그때의 허무함이란. 유산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무기력함이 아내와 배 속에 있던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는 자책했다. 염색체 문제라고 하지만 혹시나 내가 먹었던 약과 음식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임신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니 어깨 통증 때문에 먹었던 항생제와 운동 시 복용했던 단백질 보충제가 떠올랐다. 설마 이것 때문일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불안하고 쓸모없어 보였다. 엽산도 좋은 거 사서 먹을걸. 다 똑같다는 블로그 후기를 보고 싼 것을 산 게 조금이라도 여파를 미친 것은 아닌지 후회됐다. 몸은 회사에 있었지만 마음은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았다.
그렇게 멘탈이 시시각각 흔들렸지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한꺼번에 겪는 아내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냉정하게 보면 나는 외부인이다. 임신이 어떤 느낌인지, 뱃속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체감할 수 없다. 이런저런 말을 건네 듣고 간접적으로 임신을 체험할 뿐, 몸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를 절대 느낄 수 없다.
만약 내가 유산을 했다면 어떤 마음일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그 상황을 아내는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여성의 몸은 임신과 동시에 호르몬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유산도 출산과 유사한 변화로 인식한다고 한다. 간단한 수술이 아니라 엄청난 에너지와 체력이 아내 몸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또한 아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주변 동료들이 위로를 건넬 때, 나도 대답하기 어려웠다. 애써 담담하게 괜찮다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돌아서는데 아내 생각이 났다. 나 역시 버거운 이 상황을 당사자는 어떻게 견딜까. 행여나 여성의 불찰로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을 감당하고 있지 않는지 걱정이 됐다.
우리에게 8주란, 짧지만 강렬했던 추억이었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짐이었다.
기쁜 소식을 너무 빨리 알렸던 탓에 부모님, 특히 각자의 할머니에게 마음의 못을 박아야 했고 가뜩이나 좁은 집에 기약 없는 짐이 쌓여 있었다. 아기 용품이 좀 큰가. 누나에게 물려받은 아기띠와 카시트도 한 몫 했고 지인들이 선물해준 육아 대백과 사전은 내가 갖고 있는 책 중에 가장 두꺼워서 숨겨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만난 8주 차, 아내는 초음파실에서 앙팡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또 울음을 터트렸다. 서로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오늘이 의미 있는 방문인 것을 알고 있었고 온 신경은 그곳에 있었다. 당황하는 의사 선생님을 뒤로한 채 조용히 다가가 발끝을 잡아줬다. 앞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것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