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준 거라곤 연평균 성장률보다 적은 수준의 연봉 인상뿐인데, 7년 만에 처음으로 (그럴싸한) 혜택을 받았다. 이름하여, '4박 6일' , '주말 낀' , '호주' , '패키지' , '출장'
일단 한국을 떠나니 행복한데 주말 포함이고(ㅠㅠ), 호주는 옳지만 요즘 시대에 패키지가 웬 말인가!!! 하지만 엄연한 출장이어서 6일간 급여가 나오는 건 반가웠다. (놀면서도 돈이 나오다니)
호주는 그동안 다닌 여행지 중에서 단연컨대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먹이를 주면 우르르 몰려다니는 비둘기 패키지가 되어도, 아름다운 도시 '시드니'가 주는 매력에선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조직에서 '선발' 되었다는 나름 그럴싸한 핑계가 여행 같은 출장에 대한 즐거움을 한껏 부풀려 주었다.
그런데 도착 첫날, 밤늦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 오빠 속이 이상해.
.. 상한 거 먹은 거 아니야? 이제 너 음식 잘 먹어야 하는 거 알지? 아무거나 먹지 말고.
. 나 잘못 먹은 거 없는데 왜 그러지? 설마 이게 입덧인가?
.. 에이 벌써? 입덧은 좀 지나야 오는 거 아니야?
. 그런가.. 몰라 오빠 없는데 왜 이러는 거야 ㅜㅜ
.. 알았어 빨리 갈게 조금만 참아봐;;
. 응,,,
일단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아내를 안심시켰다. 도착 첫날인데 무슨 수로 빨리 간단 말인가. 평소 같았으면 뻥치지 말라며 대화 속 농담을 잘도 집어내는 아내가 그날따라 기운이 없었다. 임신 후 증상은 작은 것 하나도 신경이 쓰인다. 무언가 잘못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선다. 눈 앞에서 새끼를 품고 뛰는 캥거루가 신기하면서도 측은했다.
다음 날 걸려온 전화에서는 구토를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구토?
임신을 했는데 왜 토를 하지?
내가 알기로는 입덧은 토를 하는 것은 아니고 토 하기 전까지 '욱-' 하는 정도로만(그게 그건데,,, 나도 안다. 한심한 거) 알고 있었는데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제야 처음으로 '입덧'을 검색했고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전~~~~~혀 다른 게 입덧 임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입덧에 대해 완벽히 잘못 알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주변을 보면 가끔 연애를 글로 배워 서툰 친구들이 있다. 남 흉볼 처지가 아닌 게, 나는 입덧을 드라마로 배웠다. 장담하건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혼 남성들은 식탁에서 밥 먹다 말고 입을 가리며 화장실로 뛰쳐나가는 것 = 입덧, 딱 그 수준으로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 미디어가 입덧을 그렇게만 표현하는지 모르겠지만(혹은 내 무관심 때문인지) 확실한 점은 우리가 입덧과 임신을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밥 먹을 때 뛰쳐나가는 장면이 임신을 처음 접하는 '클리셰'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내의 입덧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다. 그래서 호주에서 들은 아내의 증상이 입덧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형, 입덧이 뭔지 알아?
> 모르지, 내가 결혼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 응 그렇지, 맞는데 그래도 지금 상태로 알고 있는 거 말해봐.
> 지금? 음.. 입 막고 뛰어가는 거 아니야? 티비에서 그러잖아.
.. 식탁에서 밥 먹다 말고, 맞지? 그리고?
> 글쎄 모르겠네. 우리 누나도 아직 결혼 안 해서 그런 건 나는 몰라.
친한 형(37살, 미혼)과 싱겁게 끝나버린 대화다. 그 외에도 결혼하지 않은 동료 3 명에게 물었는데, 대답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임신과 입덧이 모르쇠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렇게 우리는 무지하다.
입덧 (by 위키백과)
입덧은 산모가 겪는 임신 초기 증상이다. 종종 입덧 증상은 이른 아침 시간에 발생하고 하루가 저물면서 증상도 함께 완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루 중 시도 때도 없이 구역질과 구토 증세가 발생한다. 통상 임신 6주 정도에 시작되어 12주 정도에 끝난다.
사전에는 12주에 증상이 끝난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 출산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먹고 토하기를 9개월 내내 하는 산모가 있다니, 실로 놀랍다. 입덧의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토덧, 가차 없이 먹어버리는 먹덧, 내 침마저 삼키기 어렵다는 침덧 등 증상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신기한 점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입덧의 원인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태반이 생성되며 나오는 HCG(프로게스테론을 생성하게 도와주는) 호르몬 분비가 입덧 시기와 유사하기에 그렇다고 추측하기도 하며, 산모가 태아를 '이물질'이라고 여겨 엄마 몸에서 생기는 거부 반응 중의 하나로 보는 썰도 있다. (그래서 태아가 배우자를 닮을수록 입덧이 심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호주에서의 6일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아내가 일주일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나타난 게 아닌가. 그동안 출장에서 돌아올 때면 말하지 않아도 공항까지 마중 나오곤 했는데, 오늘은 집 앞 지하철역에 겨우 걸어 나왔단다.
당황한 나는 정말 괜찮은지 몇 번을 되물었고 아내는 못 이긴 척 오늘은 그나마 어제보다 괜찮다고, 오빠가 와서 괜찮아진 거 같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힘들지 않은 척 나를 향해 억지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는 아내의 모습에 전화상으로 말하지 못한 고통이 숨어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