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반려 취미 탐색기 #10
우리말의 "향수"란 단어가 퍼퓸(perfume)과 함께 노스탤지어(nostalgia)의 의미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나자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스스로의 통찰이 대견하고도 놀라워 쾌재를 부르고 싶었지만, 빽빽한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액션은 없었다. 지하철을 나오자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함박눈은 그 흥분을 배가시켰고, 눈을 맞으며 걷는 걸음은 경쾌해졌다. 함박눈이 쌓여가는 눈 앞의 세상이 새롭게 보였고, 몰랐던 한 세계가 열리는 것만 같았다.
평생 무심했던 향수라는 아이템에 대해 나의 관심을 촉발시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어쩌면 인터넷으로 주문한 샴푸나 바디 크린저의 향이 내 취향에 너무 안 맞아 마주했던 곤경이 향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 것일 수도 있고(수질오염을 생각하면 그냥 버릴 수도 없으니 무척이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오랜 기억과 단단히 밀착되어 생생하게 저장되어 있는 후각의 어떤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내 평생의 가장 생생한 냄새 혹은 후각의 기억은 내 나이 열한 살 무렵의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난 후 내 엄마가 마지막까지 몸을 뉘었던 노란 이불이 불태워질 때의 매캐하면서도 그윽했던 향기는 내 안 어디에 단단히 안착되어 있다가, 문득 엄마 생각이 날 때나 가을날의 노란 은행나무길을 걸을 때에도 생생히 살아나 나를 단번에 쓸쓸했던 유년시절로 데려다 놓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속 홍차와 마들렌의 향기처럼.
(프루스트 효과!)
후각이 시각이나 청각 등 다른 어느 감각보다 기억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는데 냄새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얘기는 그래서 바로 이해가 되었다. 후각의 자극을 전달하는 영역이 기억과 감정을 다루는 편도체 및 해마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뇌과학 연구의 성과를 거치지 않아도, 체험적이고 신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경로로 시향을 해보게 되면서 향들의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은 낯선 언어를 배우는 것과 유사했다. 아는 향을 늘려가는 일은 감각의 세계가 확장되는 쾌감을 선사했고, (자연에서 유래된 여러 향들처럼) 이미 뇌 안에 저장되어 있었던 향을 경험하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주의를 기울여 직접 후각을 통해 신체적으로 알아가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단일한 하나의 기의를 가진 기표였던 향은 시향을 거듭할수록 다양한 레이어의 풍부한 기의를 가진 어떤 기호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하니 나날이 인간과 가까워지는 AI가 아직 제대로 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는 감각이 바로 후각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출근길 인파 속에서 저 혼자의 조용한 호들갑으로 끝났던 그 날의 통찰을 촉발시켰던 건 사실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책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7월 1일. 조향사가 되어 첫 번째 향수는 언니를 위해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해맑게 잘 웃는 배향매"
- 정혜윤, 『아무튼 메모』, 위고, p75
메모하는 습관에 대한 가벼운 이야긴 줄 알고 들고나갔던 책에서,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이들의 생일이 표시되어 있다는 달력의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조향사"란 단어에 시선이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월호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기억해야 하는 과거'의 다른 이름이 되었으므로. 그런데 거기서 "조향사"란 단어가 나오니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언니를 위해 향수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는, 해맑게 잘 웃었다는 배향매라는 꽃처럼 어여쁜 이름에.
그리하여 느닷없이 시작했던 취미생활에 새로운 목표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멋진 향수를 만들어보자. 쉽게 휘발되지 않고 오래 기억되는 향을. 맑고 향기로운 화이트 플로럴에 상큼 달콤한 배향과 따뜻하고 부드럽고 지속성을 더해줄 향들을 더하여... 언젠가는 "배향매"라는 이름으로 불리워도 좋을 향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