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의 소중함과 드라마 인간 실격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무려.. 60일이 지났네요 ㅠ_ㅠ 작가님 글이 그립네요..."라는, 자동 발송으로 내게 닿은 짤막한 메시지에 왠지 모를 반가움이 일었다. 경직된 얼굴 근육이 풀어지는 것도 같았다. 지난달 방문했던 치과에서 (스트레스로) 이를 악무는 습관이 없냐는 말을 듣고는 좀 의아했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정확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년간 유지해오다 오래 방치되었던 독립형 개인 블로그에서 뭔가를 끄적이는 게 살짝 어색해졌던 것이 작년 가을쯤. 이후 어떤 계기로 브런치를 기웃거리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 기분이 상당히 업되었던 건 기억이 난다. 마치 누군가 내 얘기를 듣고 싶어 귀 기울여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던.
물론 그런 일은 없었으니 그 모드는 대략 열흘 정도 갔던가? 그런데도 가끔 이리 다정하게 말랑한 알림이 오면 반가움에 걸음을 멈추고 한 호흡을 고르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매일매일이 밋밋해진 거 같다고. 어쩌다 한 번씩이라도 주절주절 일상을 기록하는 걸 멀리하면서, 나름의 빛나는 삶의 한 조각으로 간직되었을지도 모를 일상의 디테일들이 그저 휘발되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래서 지극히 사소하고도 대수롭잖은 오늘의 일들을 다시 한번 끄적여보기로 할까, 하고.
(그러고 보면 브런치에 계신 분들, 정말 일을 잘하신단 말이지...)
요즈음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그래서 내 삶의 낙으로 등극한 드라마가 있다. TVN 드라마 <인간실격>이다. 숨 죽여 몰입하게 만드는 전도연의 더 깊어지고 아름다워진 얼굴과, "잘 생김을 연기하는 배우"를 넘어 이제는 그냥 잘 생긴 배우가 된 유준열의 속수무책의 매력에선 눈을 떼기가 쉽지 않지만, 그 몰입의 강도를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반복 등장하는 두 사람의 내레이션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타인을 향한 시선의 밀도와 무게를 고스란히 높은 해상도로 전달하는 그 편지 형식의 언어들은, 그들 사이를 떠도는 공기의 성분마저 깡그리 포획하여 보여주는 것만 같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났던 한 친구는 류준열의 아찔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보기는 힘들겠다고 했다. "폐색 짙은 절망을 희석시켜줄 중화장치"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녀가 보내온 안타까움의 ㅠㅠ를 잠시 바라보다 아무런 답문자도 보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패색 짙은 절망"으로만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친구가 그 풍경들에서 절망의 신호를 크게 감지한 것에는, 친구의 살아온 이력에 기인한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말이다.
내게 느껴지는 <인간실격>은 절망에서 시작하지만 이미 희망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웜톤의 드라마이고 종종 명랑하며 사랑스러운 쪽의 드라마다. 큰 상실로 인해 크나큰 절망을 껴안게 된 이부정이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매번 심금을 울리고 (내 어머니 아버지가 그리 일찍 가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도 좀 더 열심히, 좀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탐탁지 않은 시어머니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대드는 태도에는 통쾌함이 있으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 대해, 또 그 자신에 대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건강한 긴장과 유머를 잃지 않는 강재의 태도 역시 단지 폐색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 짠하고도 사랑스러운 조연들이 발하는 명랑과 온기와 더불어, 이제 서로를 마주하게 된 두 주연의 시선 자체가 서로의 절망을 상쇄시켜 죽음보다는 삶 쪽으로 돌려줄 가장 강력한 중화장치가 아니겠는지!. (그렇게 되기를!)
물론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 자체는 매우 절망적이고 출구를 찾아내려는 안간힘이 필요한 설정임에는 틀림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대체로 선량한 사람들이 그저 둔하거나 무심하여 타인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조차 날카로운 상처를 주는 장면들. 정수와 정수 어머니와 부정과의 관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리 사소하여 일상적인 삶의 비극들은, 타인에 대한 디테일이 결여된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 지를 매우 리얼하게 날 것으로 보여준다. 삶의 디테일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 자신과의 내적인 관계에서도.
어쨌거나 드라마는 재미있다. 고작 6화까지 보고서 이리 주절주절 떠들고 싶어질 만큼. 방영시간은 왜 이리 짧고, 주말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리 긴 지. 종영하고 몰아서 볼 걸 그랬어...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언젠가 "냥이와 함께 살면서 일상에 디테일이 생겼다"라는 라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고, 냥이와 함께하기 어려워 디테일이 부족한 처지를 잠시 비관했었는데, 그것이 블로그든 브런치든 다시 시작해봐야겠다고 맘 먹는데 한 몫을 하기도 했네. 그러니까 냥이 대신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