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파스투로, <색의 인문학>을 읽다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다음날인 오늘, 뉴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붉은색은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레드’ 콤플렉스를 기반으로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빨갱이"라 낙인찍으며 공포정치를 이어가던 세력들이 어느새 붉은색을 입고 나와 세상을 장악하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색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며 “변화무쌍한 역사가 있는” 것임을 모르지 않으나, 그 변화무쌍한 변화를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목도하고 있으려니, 새삼 오래 살았구나 싶기도 하다. 색을 많이 다루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 생존을 이어온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만, 오늘 보이는 붉은색은 정말이지 꼴도 보기 싫다. 내일도 그럴 것 같고, 아마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역사가이자 인류학자인 미셸 파스투로가 말하는 컬러의 비하인드 스토리 <색의 인문학>에서는 빨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소심한 파랑과 달리, 빨강은 오만하고, 야심만만하며, 권력 지향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 주기를 원하는 색, 다른 모든 색을 압도하고자 하는 색이다. 하지만 이런 빨강의 거만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거는 썩 영광스럽지 않았다. 빨강에는 숨겨진 면이 있는데, ‘나쁜 피'를 일컬을 때처럼 ‘나쁜 빨강'이 그렇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빨강은 폭력과 분노, 범죄와 과오로 얼룩진, 고약한 유산이 되었다…”
미셀 파스투로가 펼쳐 놓는 흥미로운 색의 역사 속에서 빨강은 여느 색보다 강력하고 역사가 긴 상징적 이원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빨강이 ‘불과 피'라는 두 개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에서 기인한다. 생명과 부활-죽음과 지옥, 구원의 성스러운 피와 사랑-범죄와 금기의 양면을 상징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빨강은 교황의 성스런 의복에서도, 매춘부와 팜므파탈과 마녀의 의복에서도, 법정의 법관의 옷과 사형 집행인의 장갑과 두건에서도 나타났다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의 상징이 되었다가, 또 공포 정치를 상징하는 색이 되기도 한다. 축제나 산타클로스, 공연과 에로티시즘의 영역에서도 열 일 하는 빨강이다.
이 책의 빨강 편은 미셀 파스투로 개인의 에피소드로 끝난다. 빨간색 중고차를 선택했다가 주차장에서 철제 격자가 떨어져 차가 망가졌을 때 이렇게 생각했단다. “상징에는 다 이유가 있어. 내 자동차는 정말 위험한 자동차였어.”
어제의 선거 결과로 우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은 오늘, 여기저기 창궐하는 빨강을 보며 상징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정말 위험한 색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셀 파스투로의 이런 결론은 믿고 싶어 진다. 지금 빨강은 후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빨강이 고약한 유산으로서 효용을 끝장내고, 오명을 벗고, 다시 생명과 사랑 같은 선하고 가치로운 편에서 두루 쓰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사실 빨간 색도 정말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고 잘 쓰인 빨강은 정말로 예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