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반려 취미 탐색기 #5
좌충우돌 반려 취미 탐색기 #5
날이 너무 좋다, 는 말이 여기저기서 탄식처럼 나온다. 여행 자제가 강력히 권고되는 코로나 시국에,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폐부를 파고드는 여행에의 갈증을 다들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때 동경의 대상이던 여행작가들은 어떻게들 살고 계시려나...
MBTI 검사에 의하면 나는 INFP, 이상을 추구하는 몽상가, 잔다르크형이다. 나를 잘 아는 친구는 검사 결과를 보더니 너무 잘 맞는다며, "그렇게 전형적인 인간이었어?"라고 놀리기도 하였는데, 그 특징 중의 하나가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처럼 폼나게, 홀연히 떠남을 감행해본 일은 별로 없다. 일거리가 생겨서, 여행경비가 지원되어서 가능했던 여행이 과반수다. 용감하게 집 보증금을 털어서 여행을 갔다 온 후 책을 써서 대박이 나는 스토리는 그런 모험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의 첫 해외 여행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다. 샤머니즘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팀에, 스틸 사진을 찍어달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딴 세상을 보고 싶어"를 외쳐대던 시기였으니, 따로 보수는 없어도 경비 부담 없는 여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절대적이던 나의 시간과 공간을 처음으로 이탈해보는 경험은 짜릿했고 신기했다. 와아, 함성을 지르며 도착한 부다페스트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부다와 페스트를 나누며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 강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다리들, 강언덕에 자리한 나지막한 고성들과 거리의 건물들 속에서 도시의 과거와 현재는 다정하고 조화롭게 찬란하였다.
헝가리 샤먼 전통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났던 일도 그 여행에서 누릴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부단한 일상의 노력을 통해 영적 에너지를 호흡하면서 자연과 우주와 교감하려는 그들. 소박한 삶 속에서 누리는 여유와 행복을 엿보면서, 그들이 누리는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그로 인해 발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기억.
그로부터 몇 년 뒤에도 비슷한 기회가 생겼다. 중앙아시아와 극동 지역 어디의 광활한 고원지역들을 탐사하는 학술팀의 스텝으로 참가하는 제안이었다. 여행으로도 가기 힘든 지역들인 데다 팀 구성이나 내용도 훌륭하여 놓치기 싫은 기회였으므로 고민 끝에 사장님께 톡을 날렸다. 이러한 기회가 있는데 열흘만 미리 휴가를 쓸 수 없을까요?라고.
그때 받은 답톡은 이랬다.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포기하고 다리를 얻었는데, 당신이 여행을 포기하고 우리 회사에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어요…..”
더 할 말을 찾기 어려운 단호한 대답에, 나는 애써 마음을 비우고 회사를 위해 참으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렇게 날려버린 여행은 한참 동안 아쉬움을 남겼다. 여행을 포기하고 얻은 것은 다시 야근과 밤샘이 이어지는 고단한 직장생활. 건강악화로 그나마도 오래가지도 못한. 그렇지만 그 생활이 인어공주의 다리처럼 물거품이 된 건 아니었다 생각한다. 그때 단련된 근육들이 이제까지 무사히 삶을 영위하는데 바탕이 된 나의 생산성에 크게 기여했다 믿기 때문이다.
진심이다.
이후로 몇 개의 나라와 그보다 많은 도시들을 가보았지만, 카메라 달랑 메고 낯선 도시와 낯선 골목들을 서성이는 여행은 언제나 충족되지 못한 아쉬움으로, 결핍으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이다. 가끔씩 문득문득 생각한다. 떠나지 못하여 떠남이 없는 날들을 살면서 나는 어떤 목소리를 잃고 있는지, 그 대가로 내가 껴안고 있는 이 일상은 내게 어떠한 의미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