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반려 취미 탐색기 #6
유튜브에서 논문을 읽어준다는 인지심리학자 김경일의 영상을 보았다. <10kg 감량 보장>이라는 핫한 제목으로 소개하는 논문은 Pablo Brinol이라는 스페인 심리학 교수가 쓴 <Treating Thoughts as Material>이다. 실험에 의하면 어떤 생각을 종이에 쓰고 그것을 고이 접어 지갑에 간직한 사람은 그것을 찢어서 버린 사람에 비해 그 생각을 유지하고 실천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한다. 그래서 이 친절한 인지 심리학자는 긍정적인 생각이나 중요한 결심은 종이에 써서 고이 간직하고, 부정적인 것은 종이에 쓴 다음 쫙쫙 찢어 버리자고 권유한다. 이렇게 생각을 물질처럼, 혹은 물질화해서 다루는 방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니, 나약한 의지의 극복을 위해 기억해두기로 한다.
필기구의 사용이 극단적으로 최소화되는 디지털 시대에도 문구를 좋아하고 필기구에 꽂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질화하여 간직하고 싶은 소유의 욕망. 그 대상이 생각이든 태도든 필기구 그 자체이든. 특히 만년필 애호가들의 이야기들- 만년필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피로, 혹은 척추뼈로 쓰는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들까지-을 떠올려 보면 그렇다. 인간의 피나 척추 역시 물질인 것이고, 그때의 물질성은 더욱 강력한 것일 테니까.
만년필 애호가들이 좋아라 하는 "척추뼈로 쓰는" 만년필 이야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 나오는 것이다. 허름한 상점가, 낡은 만년필 가게의 풍채 좋은 주인은 "꿈처럼 제 맘에 쏙 드는" 맞춤 만년필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손가락 하나하나의 길이와 굵기, 상처를 재고 윗도리를 벗게 하여 척추뼈를 더듬으며 말한다.
"인간이란 말씀이에요, 척추뼈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자를 쓰는 법이죠"
그리고 나이와 고향, 월급과 무엇을 쓰려하는 지를 묻고 나서 3개월 후 "척추에 딱 맞는" 만년필을 만들어 배달해준다. (이렇게 하루키식 감성이 진하게 풍기는 “등뼈에 맞춘 만년필” 까지는 아니어도, 실제 일본의 펜샵 거리에는 개인의 필기습관과 신체조건에 맞춤한 선택을 도와주고 만년필의 닙을 연마-튜닝해주는 펜샵이 몇 개 있고 아예 개인에 맞춰 특별 제작해 주는 곳도 있다 한다.)
한때 만년필에 마음을 빼앗긴 이후로 (내 척추뼈에 맞는... 그런 것은 못되어도) 내 손과 미적 취향과 경제적 여건에 맞춤한 만년필을 갖고자 하는 탐색의 시간이 있었다. 100분쇼에서 손석희 앵커의 손에 쥐어져 있던, 그를 닮은 깔끔한 블랙 라미 사파리에서부터 (그때는 이런 게 얼마나 잘 보이던지!) 고시생들이 선호한다는 가볍고 실용적인 펠리칸, 그 안에 또 다른 우주가 들어 있다는 오로라, 화려했던 비스콘티의 반 고흐나 오래전 선물을 받고 고이 간직하려다 어딘가에 묻어버린 몽블랑 모짜르트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늘어났던 만년필은 일상의 무게를 줄여야겠다 크게 맘먹었을 때 하나씩 필요한 이에게 떠나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라미 2000 하나. 1966년 독일 비행기 디자이너인 게르트 뮐러(Gerd Müller)가 디자인했다는 유선형의 외관은 지금 보아도 모던하고, 푸쉬캡 방식의 뚜껑이나 후드닙과 피스톤 필러 방식의 잉크 충전이 주는 편의성과 실용성(촉이 잘 마르지 않고 잉크를 많이 저장할 수 있다.)은 바우하우스 기능주의가 그대로 체현된 것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필감의 14K닙을 가졌음에도 어디에 두어도 위화감이 없이(나 만년필인데! 하는 게 전혀 없이) 편안하다. 무엇보다 예쁘다.
만년필 탐색은 그렇게 '졸업'을 하였지만, 잉크라는 디테일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다. 고가의 몽블랑 블랙은 농담, 혹은 그라데이션이 훌륭하다는데 아직 써보지 못했고, 장미향이 솔솔 풍긴다는 몽블랑 쥬뗌므나 와인 빛깔의 보르도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 천연재료로 만들어 천연향이 나는 허빈 잉크들과 까렌다쉬에서 나오는 9가지 지구색 시리즈(그랜드 캐년, 스톰, 선셋, 캐리비안 씨, 블루나잇 등) 중 몇 가지는 시도해보았었는데,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향정신성의 효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젠가 Gris Nuage(steel grey)라는 이름의 잉크를 선물로 주며 “비 오기 전의 하늘빛이래”라고 했을 때, 소녀 감성의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이래서 넌 내 친구야"
어떤 잉크를 넣어 어떤 펜으로 쓰던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을 쓰는 것일 테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물질성과 신체성, 그리고 이러한 디테일일 것이다. 정신없이 나를 흔들어 대는 오늘의 유행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 생각과 태도, 지향과 취향, 나의 고유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 이러한 물질성과 디테일에 있다고 믿으며 나는 오늘도 모니터 앞에서 만년필을 끄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