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반려 취미 탐색기 #7
"마음만 보낸다, 생일 축하해"
카톡 메시지를 날리자 바로 답톡이 왔다. "ㅎㅎ용케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러자 오래전 기억이 단번에 끌려 나왔다. 사실 친구 생일을 기억해낸 게 용한 것이 아닌 것이... 오래전 이 날은 친구와 함께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즉석 미역국을 먹은 날이고, 처음 올랐던 지리산과는 "오늘 1일"이라고 할 만한 황홀한 경험을 했던 날이기 때문이다.
대학교 졸업반이던 10월 말이었다. 뻐근한 일상의 무게에 호흡이 가쁘고 불투명한 미래가 어지럽고 두렵기도 했던 계절, 어쩌다 불현듯 친구들과 지리산에 올랐던 것이.
등산복도 장비도 없었고 산행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었다. 새로 구입해 길이 안 든 등산화에 발도 아팠다. 무지해서 용감했던 일정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건 텐트 장비도 없이 산장을 지나쳐 버린 무모함. 산중에서 갑자기 해가 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깔깔거리던 걸 멈추고 어~ 망연자실 서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천사처럼 짠~ 나타나 텐트를 건네준 아저씨들이 있었다. 각자의 텐트를 가지고 단독 산행에 올랐던 두 분이 함께 텐트를 쓰기로 하고 텐트 하나를 우리에게 내어준 것이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밤을 보내게 된 텐트는 매우 비좁아서 몸을 세로로 세우고 체온을 공유해야 했지만, 그 밤의 풍경과 공기와 냄새까지 모든 것이 공감각적으로 선하다. 잠이 안 와 텐트 끝을 올리자 내 눈높이에서 다정히 눈을 맞춰주던 별들이며, 우리를 걱정해준 아저씨들이 텐트 옆에서 장작불을 태우며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나누던 대화의 소리까지.
어쩌면 어느 아름다운 별나라에 불시착한 듯도 하였다. 칼 세이건 원작의 영화 <콘택트>에서 조디 포스터가 아버지를 만났던 베가성의 풍경처럼, 온 우주가 나를 환대하고 다정히 말을 건네는 것만 같던 행복한 기억.
그렇게 추운 밤을 보낸 후, 축복처럼 번져오는 온기를 느끼며 맞이한 해는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아직 세상에 우리가 보지 못한 이다지도 아름다운 풍경들이 많을 거라는 예감에 나는 크게 안도하였고, 그래서 하산해서 다시 서울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도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
이후로 어떤 삶의 변곡점이 필요하다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리산을 떠올렸고 몇 번쯤은 오래 뿌리내릴,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만들기도 했다. 우주의 기운을 만땅으로 받는 듯 몸과 맘이 벅차오르던 일출과 일몰의 풍경이 디폴트로 받는 선물이었다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나 나누던 음식과 술과 이야기는 옵션이었다. 비박 때 온몸으로 느껴지던 서늘하고도 충만한 생명의 기운과, 낮은 포복의 의미를 실감 나게 알려주던 찬 바람과, 크고 작은 마음의 생채기들을 후~ 날려주던 따스한 기운 같은 것들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는 나이가 들고 가야 하는 거라 힘들다 했다) 산에 가는 횟수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얼마 전 산악회에 열심인 친구 손에 끌려갔던 산행은 낯설기도 하였다. 산은 그대로일 텐데 등산의 문화나 풍경은 많이 달라 보였다. 이래 저래 지금은 소박하게 동네 까치산이나 봉제산을 아주 가끔씩 '산책'만 한다. '취미가 등산이요' 말할 처지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산이 좋다. 등산객으로 인한 훼손이 심하니 산에 가지 않는 것이 산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그런 맥락은 아니다. 그저 산이 거기 있어서, 안녕해서 좋은 것이다.
사람도 그런 이들이 있지. 그저 존재만으로, 안녕히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고맙고 좋은,
그런, 당신 같은 사람들.
오늘은 오랜만에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을 찾아 들어봐야겠다. 이 노래는 김민기씨의 낮은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