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tykwariat Aug 14. 2023

[간식 시집] 요구르트 소주의 맛

늘 스무살의 여름날 생일 파티 같은 마음으로

일박이일의 짧은 여름 휴가를 서울로 다녀왔다. 약 3주전 습기와 열기가 가득했던 날, 국립 현대 미술관과 북촌의 칵테일 바에 다녀온 기억이 강렬해서 아예 광화문 쪽에 숙소를 정했고, 마무리는 한남동에서 친숙한 공간들을 거닐며 보냈다. 광화문 일민 미술관의 카페 이마 와 한남동의 부자 피자는 어쩌다 보니 가족 여행 때 주기적으로 가게 되어 십몇년여 동안 시간과 추억이 쌓여 버렸다. 특히 카페 이마는 계산해 보니, 아이들과 2009년, 2016년, 2023년 이렇게 7년마다 간 셈이라 신기했다. 뭐든 빨리 생기고, 사라지는 시대에 "그게 아직도 여기 있어..." 싶은, 그렇게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며 세대를 이어가는 공간을 떠올리면, 문득 그 공간도 나를 기억하는 것 같고, 서로 우정을 나누는 기분마저 든다.

한남동에서는 부자 피자에 웨이팅을 걸고(무려 두시간 반..)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옆 현대카드 <바이닐 앤 플라스틱>에 갔다. 요즘 바이닐이 인기가 많으니, 깨끗한 새 앨범들이 많이 보여서 좋았다. 또 마침 우리집에 있는 티악TEAC 턴테이블로 청음을 할 수 있어서 반가웠고, 청음 테이블은 빈 자리 없이 꽉 차 있었다. 앨범 가격은 현대카드 할인을 받아도 비싼 느낌이긴 했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앨범 판매 1위는 시가렛 애프터 섹스Cigarettes after sex, 2위는 쳇 베이커Chet Baker였고, 멜론이나 빌보드 차트와 다른 결의 이곳만의 순위가 재밌었다. 하지만, 중고 엘피 가게들 처럼 종류가 다양하거나, 숨겨진 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쉬웠다. 아무튼 힙합, 재즈, 락, 가요 코너를 돌다가도 여전히 발길을 오래 멈추는 곳은 비틀스와 퀸 앨범이 있는 곳이다. 특히 비틀스는 정말 모든 앨범이 다 있어서 2023년에도 여전한 그들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비틀스 앨범을 보다가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앨범도 구경 하다 보니, 예전에 플로리다 올랜도의 한 레코드 가게에서 중고로 5달러 밖에  안 하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앨범 <Double fantasy>를 살까 말까 알콩달콩 하던 연인들도 떠올랐는데, 그 앨범은 여기서 안 보였다. 하지만 더 멋있는 앨범 <Two virgins>를 발견하기도 했다.


어느새 테이블에 착석할 순서가되어 현대카드 <바이닐 앤 플래스틱>에서 나와서부자 피자로 향하던 길에 예전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핀 율Finn Juhl 가구 매장이 보여서 반가웠고, 이어서 나는 바로 그 옆에 The Beatles라는 라이브 펍의 간판을 발견했다. '비틀스'라는 이름도 반가운데 '라이브 펍'이라니. 나의 모든 인터넷 아이디에는 'beatles'가 꼭 들어가기에 비틀스는 언제 어디서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일단 밥부터 먹고 광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잠깐이라도 그곳을 탐색해보자 싶었다. 부자 피자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다섯시가 될 것이고, 그곳은 다섯시에 문을 여니, 용산 역에서 여섯시반 기차를 타기 전까지 나에겐 약 한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비틀스 라이브 펍>이라고 써있는 간판과 비틀즈 사진들을 가까이 만나니,  갑자기 20여년전의 기억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그곳은 네이버 플레이스의 안내와 달리 다섯시가 아니라 여섯시 오픈이었고, 우리는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ㅜㅜ) 나는 PC통신 하이텔 비틀스 모임, 캐번클럽의 회원이었다. 대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가입한 그 모임에서는 정말 당시는 구하기 힘들었던 비틀스 관련 자료들이 무척 많았다. 카페를 빌려 한달에 한번 정도씩 '영상회'도 하면서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비틀스 영상들을 감상할 수 있었고, 신입 회원일 때 '헤이 주드' 정도만 알았던 나는 결국 비틀스 전 앨범을 다 소장하게 된다.​


1999년 늦여름, 딱 이맘 때, 교대 앞 어느 카페에서 비틀스 영상회를 하며 겸사 겸사 나의 생일 파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은 스무살의 생일.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답게 선물은 모두 CD였는데, 비틀스 초기 앨범 외에 도어스 1집도 있었고, 비틀스의 희귀 음원을 모아서 '구운' CD도 있었다. 서로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함께 했던, 흥분과 우정으로 가득했던 분위기였다.

그 후, 스무살의 겨울에 열린 송년회에서 그날과 비슷한 분위기를 한번 더 느끼기는 했다. 우리 모임에서는 비틀스 트리뷰트 밴드도 두 팀이나 있었는데, 그 밴드의 공연을 보면서 우리는 선물 경매도 하기로 했다. 그 밴드의 여자 친구들이 한쪽 구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분들은 너무나 하얗고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모임에서 내가 좋아했던 언니는 한시간 정도 늦게 왔는데, 10분 정도 늦었다고 헐레벌떡 뛰어온 나와 달리, 느긋하고 여유롭게 들어와서, "00이는 절대 뛰지 않지" 라는 말을 듣길래, 나도 다음엔 늦어도 뛰지는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난다. ㅋ​ㅋ


송년회의 하이라이트 선물 경매가 드디어 시작되었을 때, 내가 준비한 선물은 '요구르트 소주' 였다. 지금 생각하면 왠지 부끄럽다. 그래도 당시 칵테일 소주가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무렵이어서, 나름 야심차게 기획한 거였다. 신촌 현대 백화점 화장실에서(!) 삼다수 큰 페트병을 사서 물을 버리고 소주를 담고 요구르트를 담고 등등 우아하지 않은 제조 과정을 거쳤지만,  당시 '얼굴이 빨간 아이'라는 나의 캐릭터와도 잘 어울렸던, 요구르트 소주이기에  높은 경매가로 팔렸던 기억이 난다. 요구르트 소주맛은 어땠을까. 정말 아이(요구르트)와 어른 사이(소주) 스무살처럼 어쩐지 어색한 맛이 아니었을지..그리고 나는 경매에서 무엇을 낙찰 받았냐면...바로 서태지와 아이틀의 1집 LP였다. 별로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던 이유는..다들 이미 내거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양보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마돈나 1집 앨범이 나왔는데, 누군가 이건 명반이라 꼭 사야한다고 쿡쿡 찌르긴 했지만..나는 또 나름 사고 싶은 걸 산다며 고집을 부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주고 받던 대화들이 참 그립다. 별거 아닌 소재, 사심 없는 속내, 하지만 뭔지 모를 설레임의 기운이 감돌던.


아무튼 이후로 이 모임의 사람들과 계속 플랫폼을 바꾸어 가며 연락을 이어 가다가, 흐지부지 되어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각자 삶의 단계를 밟아 가며 함께 나이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땐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어른으로서의 삶을 처음 살아가는 것의 무게감이 때로는 무거운 형량의 선고를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조금씩 어른의 삶에 익숙해져서 어른이기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다 보니, 또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이제 나의 역할 안배를 하는데 있어서 덜 허둥대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이 또 나에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내 주변의 관계를 잘 지켜가면서 그들과 시간을 계속 함께 쌓아가고 싶다. 늘 스무살의 여름날 생일 파티 같은 마음으로.


오늘의 표현

'늘 스무살의 여름날 생일 파티 같은 마음으로'

#간식시집



이전 04화 [간식 시집] 어느날 스타벅스에서 우연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