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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Jul 30. 2023

[간식 시집] 밀크 커피, 사랑이 모든걸  다 할것

어제 밤에는 오랜만에 술을 한잔 마셨는데, 두통이 있어서 타이레놀을 먼저 먹고 기다렸다가, 두어시간 후에 선물 받은 레드 와인을 열었다. 최근에 너무 몰입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리고 그 일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가끔 마시는 저녁의 술 한잔도 참았기에 수고한 나에게 주는 한잔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뭔가 아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아서 술맛이 나지 않았다. 요 몇달 동안은 계속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기에, 무척 신이 나 있었기에, 일이  다 끝난 주말에 이렇게 차분한 마무리를 하는게 어쩐지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할까. 가슴이 폭발할 거 같이 흥분된 에너지가 '나를 감싸 안아'야 술을 신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에너지가 끓어 오르지 않아서 겨우 100ml 남짓을 여러 시간 걸쳐 나누어 마시면서 밋밋한 밤을 보냈다.

지난  2주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느낀 것은, 결국 그 누구의 입맛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처음 그것을 하고 싶었던 시작점이었던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일단 보여줘야 한다. 내가 어제 느낀 찜찜함은 바로 이것이었다. 과감하게 내것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누군가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수정과 타협을 거듭했다는 것. 그래서 러프했던 부분이 조금 다듬어지긴 했어도 이도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처음 드래프트가 나왔을 때는 "연구자세요? 웬만한 전문가 보다 잘 썼다" 는 이야기를, 두번째 드래프트가 나왔을 때는 국립 기관에 지원해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그러나 세번째 최종안에서는 상상력이 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주제도 참신하고 좋은 시도를 한 부분도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어쨌든 "제목이 반을 다했다." 는 것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제목이 반이면, 그럼 나머지는? 처음에 기존의 익숙한 것을 전복하는 제목을 정하고, 이후 끝없이 진행되는 생각의 연결 고리와 나의 필요에 맞게 우연히 만나는 것들이 이어지며 빗장이 풀린듯이 뇌와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했다.  정말 그것은 '상상의 자유' 이자 '나의 해방'이었다. 하지만, 너무 귀가 밝은 나의 충직함이 위트를 잃어버렸다고나 할까. 사실은 '창작'의 기본은 틀을 깨는 것인데, 모든 평가 항목에 충실하려고 애썼던 것이, 내가 마지막 무언가를 한번 더 찾아보자, 이걸 더 해결해 보자 하는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꺾었던 것 같다.  결국 내맘대로 하는 것이 후회가 없다. 또한 평가자가 한 명일 때와 세 명일 때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태도 외에는 각자 다른 걸 원하고,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을 또 놓쳤다. 간절함이 때론 독이 된다는 것을.

술은 맛없고, 잠은 설치고, 마음에 후회가 밀려와 견딜 수 없던 차에 어느새 아침이 되었고, 아무튼 배도 고프고 하니 커피를 내렸다. 최대한 순간에 집중하면서, 드립백을 천천히 뜯고, 커피를 조심히 내리고, 우유를 방울 방울 떨어 뜨렸다. 그 순간의 행위, 감각에 다시 몰입해야 쓸데 없는 생각이 사라질테니까. 블랙 커피보다 밀크 커피는 우유의 지방 성분 때문인지 마음을 더 누그러 뜨린다. 거품 없이 우유와 커피가 서로 스며들어 캐러멜 같은 달콤하고 부드러움을 자아내는 색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커피를 만들고, 이어서 또 생각이 나를 잠식하기 전에 몸을 움직이는 일을 만들어야 하니, 필사를 시작했다. 아침의 커피와 필사, 어쨌든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일상이 나를 살린다. 친구들과 7월의 필사는 내가 이끌었는데, 어느새 마지막 장이 되었다. 연필을 깎는데, 글씨를 '명조체'로 쓰기 위해 최대한 뾰족하게 깎았다. 그것도 누군가가 지켜보면 속터질 만큼 천천히 집중하면서. ㅋㅋ 이번에 필사하는 내용은 한정원의 <시와 산책> 중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챕터였다. 그리고 <시와 산책>이라는 책의 당연한 마무리일 수도 있지만, 마침 지금 나에게 필요했던 말이기에 그 우연에 감사하며 또박또박 필사를 했다.


“하지만 후회를 간직하고도 나아가야 한다는 걸 지금은 근근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잃고 나서도, 실패하고 나서도, 다시 꿈을 꾸어야 살 수 있다는 걸요. 성소란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운명을 지키려는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요.

​(......) 아직 별이 보이는 검푸른 하늘 아래를 걸어서요.“  한정원, <시와 산책>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밤하늘처럼", 조지 고든 바이런,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어차피 내가 걸어가는 길은 당연히 꽃길이 아니라 검푸른 하늘 아래일 것이고, 그래도 별을 바라보며, 별이 있음에 위안을 받으며 걸어갈 수 있는 거겠지. 이어서 '꿈'과 관련된 말들을 찾아 보았다.​


“나는 오히려 현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는 그것을 꿈이라고 여기는 편이지. 행복은 무상한거야. 프란츠가 말한다. 그것은 책에도 쓰여 있고 우리 나이에는 경험으로도 알고 있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이 꿈의 무상함인지 현실적 삶의 무상함인지 가리면 뭔가 달라질까? 내가 그것이 꿈이라고, 꿈일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 다짐하면 나는 그 꿈이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그 순간에 무조건 빠져들 수 있다. “96쪽.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나는 페미니스트, 흑인, 거대 도시에 사는 은둔자, 그리고 열 살 때의 꿈을 잊지 않고 여든 살이 되어서도 계속 글을 쓰고 있기를 꿈꾸는 작가이다.” -옥타비아 버틀러


나는 지금 이후로 다가오는 삶의 매순간에 망설일 새 없이 거듭 빠져 들어야 하고, 또 여든살까지도 살아가야 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아무튼 계속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에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지금 무슨 일이 벌어 나는지 두리번 거리는 것,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순간을 감각하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손 빠른 서기가 되지 못하게 작가를 구속하는 사슬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단테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문체'입니다. 손이 빠르지 못한 서기의 손은 낡은 문체를 받아쓰는 데만 익숙합니다. 공증인과 구이토네와 보나준타가 그랬고, 사실 작가 단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단테는 결국 그런 문체에서 벗어났습니다. 낡은 문체는 이미 만족스럽지 못한 도구였으니까요.

사랑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으려면 조금 더 연마된, 색다른 문체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매듭을 풀려면 '혀가 거의 스스로의 충동에 못 이겨 움직이는 것 같은' (이것은 과거 제가 공책에 기록해두었던 단테의 <신생Vita Nova>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문체가 필요합니다.​

앞서 읽어드린 부분에서 흩어진 부분들을 연결해 보니 거의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어떤 언어도, 그 어떤 글도 저절로 형성되거나 쓰여지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거의의 의미는 아마도 마치에 가까울 것입니다. 즉, 서기 역할을 맡은 작가가 열심히 노력해서 말을 글로 옮길 때 그것이 마치 내면으로부터 바깥으로 스스로 뛰쳐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져야 합니다.

새로운 문체가 진정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낡은 문체의 한계를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 해야 합니다. 사랑이 불러주는 단어를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보나준타는 그럴 의지는 충만했지만, 사랑이 불러주는 받아쓰기를 쫓아갈 정도의 학습과 연습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 146-150쪽. 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새로운 문체‘를 위한 ’학습‘과 '연습'. 결국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가치가 있으면, 내 안의 그 사랑이 흘러 넘치게 채우는 것, 그 사랑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을 수 있도록 계속 나를 단련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후회에 몸부림 치기보다 꼭 해야할 일이 아닐까. 제임스 조이스가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기를 사랑한다" 했던 것처럼. 결국 사랑이 모든걸 다할 것이다.

​오늘의  표현

‘사랑이 모든걸 다할 것이다’


#간식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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