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녹차를 우리며
* 프랭크 오하라의 <점심 시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나 ‘시집’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친구가 지난주에 광주 비엔날레를 보러 오며, 나에게 섬진강 녹차를 선물해주었다. 차를 공부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친구는, 일상에서는 늘 차와 함께 한다고 했다. 친구의 차, 다구, 책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조금씩 차에 대해 시각을 넓혀가는 중인데, 사진으로 가끔 보여주는 친구의 정갈한 찻자리를 보면, 커피나 와인과 함께할 때와 또 다른 테이블 풍경이라 재밌다. 친구가 선물해 준 섬진강 녹차에는 풋풋한 풀향이 어려 있었고, 맛은 여리고 부드러웠다. 오며가며 한잔씩 홀짝홀짝 마시기 좋은 맛이었다.
이렇게 차를 권해준 친구는, 최근에 '필사'를 함께하기를 제안했다. 매달 책을 한권씩 정해서, 매일 적당한 분량의 글을 필사를 하는 것이다. 얼마전 친구가 이끄는 6월의 책이 끝나고, 7월은 내가 이끌게 되었다. 매일 필사할 글을 고르는 것도, 그 외에 더 나누고 싶은 글을 고르는 것도, 무엇보다 하루 중 시간을 두고, 잠시 책상에 앉아 필사를 하며 몰입하는 시간이 정말 좋다. 필사는 처음 해보는데, 연필의 사각사각 하는 소리의 리듬과 무념무상에 빠져 글을 옮기는 과정이 마치 명상의 시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필사의 시간 동안 만큼은 호흡이 차분해지고, 또 화가 났을 때 일단 자리에 앉아 연필을 잡으면, 화가 가라 앉는 것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필사의 시간을 함께 하는 친구는 총 세명이다. 우리는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어느새 우리의 인연이 20여년이 넘었는데, 당연히 그때보다 우리가 감당하는 삶의 무게와 고민은 깊어졌지만, 그래도 만나면 별거 아닌거에 큰 소리로 웃고, 웃을 때 가장 크게 웃은 사진을 남겨두어(보통 내 사진 ㅋㅋ) 단톡방에서 공유하며 계속 열일곱의 감수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요즘 필사를 함께하며, 매일 시간을 함께하는 우리인데, 새삼 우리가 만났던 나이를 되새기게 된 이유는, 열일곱의 내 아이가 오늘이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가 어느덧 우리가 만난 나이가 된걸 실감하고는, 우리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가 열일곱일 때, 우리반은 반 아이들 모두 함께 일기를 썼다. 반장부, 총무부, 바른생활부, 학습부, 지도부, 미화부, 체육부, 봉사부 이렇게 모둠을 8개로 나누어 매일 모둠마다 한명씩 돌아가며 모둠일기를 썼던 것이다. 일년 내내 열심히 모둠일기를 썼던 우리반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씩 일기를 골라서 학년을 마무리 할 때 학급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셋은 모두 총무부 여서 모둠 일기장을 일년 동안 공유했는데, 서로의 일기에 지금으로 치면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다행히 학급 문집을 아직 간직하고 있어서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펼쳐 보았다. 일기 속 그 나이의 고민들은 지금의 내 아이의 그것과 비슷했다. 시험 이야기, 이성 친구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간식 이야기(ㅋㅋ) 등등, 그런데, 우리가 속했던 총무부의 소개 글을 보고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 이 모든게 고등학교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지? 이담에 스무살 아가씨가 됐을때나, 아님 둘이서, 또 토끼 같은 자식들(?)과 함께 가끔 이 추억들을 들춰보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고 펼친 순간 진하게 풍겨오는 풋풋한 향내에 잠시 옛생각에 잠기게 될지도 모르겠어......모든게 그리울거야!!! 언제까지나 우리는 17세 지금의 그대로 영원히 남길 바란다!!! 사랑해요!"
약 20여년전에 적힌 이 글이 예언했듯이(?) 우리는 토끼 같은 자식들도 낳았고, 17세일 때 모둠일기를 함께 썼듯이, 지금은 필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일곱을 떠올리던 그 순간에는, 마침 함께 일기를 썼던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그 시절의 일기 만큼이나 풋풋한 향내를 풍기는 섬진강 녹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내 아이가 열일곱이 되어서야, 우리가 비로소 열일곱 시절처럼 함께 글을 나누게 된 것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사실 이 모든건 그냥 시간의 흐름이 결정한 일이었다. 그리고 열일곱의 시간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지금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지금 우리는 광주, 부산, 인천, 각각 다른 지역에 산다. 우리는 가끔 서울에서 만나기도 하고, 각자 사는 동네에 놀러가기도 한다. 우리는 모둠 일기, 필사 멤버 이기도 하지만, 경복궁 투어 멤버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고 몇년이 지난, 2003년 가을에(올해는 경복궁 투어 20주년!), 우리는 갑자기 경복궁에 갔다. 당시엔 경복궁이 지금같이 핫플이 아니어서 그곳에 놀러 가는건 무척 드문 일이었는데, 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유난히 경복궁을 좋아했다.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 짝궁과 스무살이 되면 7월 7일 1시에 경복궁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나는 정말로 그날 약속 장소에 나가긴 했는데, 한시간이나 늦어서(!) 그 친구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1999년 7월 7일에 친구를 못 만났지만, 그 후 2007년 7월 7일에 딸을 낳게 된다. ㅋㅋ 그 딸은 어느새 열일곱이 되었고, 마침 이 때 우리가 처음 만난, 열일곱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십대, 사십대를 지나 이 다음에 우리가 또 어떤 이야기를 함께 쓰게 될지 궁금해진다.
오늘의 표현
'시간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지금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