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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Jul 22. 2023

[간식 시집] 컵라면 향기는 추억을 싣고

어린이 보행자의 서울 도심 걷기, 헤매기

* 프랭크 오하라의 <점심 시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나 ‘시집’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 보행자의 서울 도심 걷기, 헤매기

오랫동안 컵라면은 커녕 라면 자체를 잘 안 먹었다. 입맛이 변해서인지 라면이 예전처럼 맛있게 느껴지지 않기도 했고, 또 이놈의  평생 올가미이자 친구, 다이어트 때문이기도 했다. ㅋㅋ 그런데, 최근에 농심 육개장 사발면을 한박스 사서 먹었는데,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맛있게 먹어서 육개장은 항상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넣어놓는 아이템이 되었다. 한편 이렇게 오랜만에 컵라면 냄새를 맡다 보니, 예전에 도서관 매점에서 나던 특유의 냄새가 떠올랐다. 요즘 편의점은 환기가 잘 되어서인지 컵라면 먹는 사람들이 많아도 냄새가 배어 있는 느낌은 아닌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 도서관 매점은 늘 컵라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


어릴 때 갑자기 변한 가정 환경에서 그때는 전혀 힘든줄 몰랐지만, 그때의 나를 견디게 해준 사람과 사물과 풍경들이 분명히 있었다고 뒤늦게 깨닫는다. 그렇게 나를 견디게 해준건 서울 도심을 어린 보행자로서 걷고, 헤매었던 순간들이다. 국립 서울 과학관, 사직동 어린이 도서관, 종로서적(종로2가에 있던 시절), YMCA 까지. 서울 동북쪽에 살던 나는 그렇게 방학이면 한시간씩 버스를 타고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가끔 동네 친구들을 당시에는 드물었던 어린이 도서관에 데려가기도 했다. "얘들아, 버스를 좀 타고 가면 재밌는 데가 있어. 거기서 컵라면도 사먹을 수 있어."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을걸 알지만, 구경 시켜 주고는 싶었기에, 컵라면으로 유혹해서 같이 가면 우리는 컵라면을 배불리 먹고, 도서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 오곤 했다.

언젠가 책 소개글로 만난 양다솔 작가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처럼 나는 엄마를 통해 그것을 배웠다. 언젠가 학교에서는 내가 쓴 '물 절약'에 관한 글로 캠페인 영상을 만들고자 했지만, 우리집에서 찍어야 한다는 말에 엄마는 궁색한 살림이 드러날까봐 바쁘다며 거절했다. 그것에 대해 엄마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어느날 나는 삼십여년이 지나 일기장을 보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엄마는 생계를 위한 자격증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우리를 박물관으로, 과학관으로, 도서관으로 데리고 다녔고, 엄마가 데려가지 못할 때는 동생과 내가 심심할 때마다 버스를 타고 그곳들을 찾았다. 그리고 언젠가 추운 겨울에는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마음의 꽃다발>이라는 책을 사기도 했다.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단편 이야기가 가득 담긴 그 두꺼운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잘 때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 궁색함 깃든 시간들이, 그럼에도 일상을 즐기고, 책을 사랑하며 쌓았던 시간들이 오히려 지금은 '마음을 꽉 채우는 꽃다발' 같은 기억들이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어린이 보행자로서 서울 도심을 구석구석 걷고 헤매었다.  주로 박물관, 과학관, 도서관이 몰려 있는 종로쪽이었기는 했지만. 종로는 나에게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한데, 나의 본적지도 종로고 어린 시절에는 명절때마다 할아버지 댁인 종로 세운상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세운상가가 이렇게 슬럼화 되기 직전,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로서 명맥을 겨우 잇고 있을 때이지만, 그곳은 나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로 꽉 채워진 공간이다. 작은 엄마들은 세운상가 1층 고려당에서 롤케익을 사오고, 고모들은 어린 나를 동대문의 스케이트 장으로 데려갈까 말까 고민하고,  풀색의 벨벳 느낌 나는 소파와 문이 달린 TV장이 있던 거실과, 캔디캔디 만화책이 쌓여 있던 고모방과 잡지 TV가이드와 기타가 있던 삼촌방, 아침에 일어나면 막 떠오르는 햇살이 비치는 남산이 보이는 뷰는 어린 아이에게도 얼마나 두근거림을 주던지. 고모의 방에는 종로 서적 포장지로 싸여진 책들도 많았는데, (당시엔 포장지로 책을 싸주었던 것 같다.)  고모들을 따라 갔던 종로 서적은 할아버지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 후에도 계속 나의 아지트가 되었다.

오랜만에 그 시절(초등학교 4-5학년 때) 일기를 꺼내보니, 다행히 도서관이나 과학관에서 컵라면을 먹었다는 기록이 많아서 내 기억이 틀린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컵라면을 먹은 횟수는 집에서가 훨씬 많을 텐데도, 음식은 음식 그 자체, 함께 먹는 사람을 넘어 먹는 장소가 주는 의미도 큰가 보다. 또한 오랜만에 컵라면을 먹지 않았다면, 이 옛기억이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 같다. 정말 컵라면 향기는 추억을 실어왔다. 도서관에서는 명랑 소설류를 읽고(일기장에 보면 이런 책을 읽는 것에 대해 반성을 많이 한다. ㅋㅋ), 과학관이나 박물관에서는 놀기만 하던 어린이었지만, 그 공간을 마음껏 누렸던 기억만으로도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린이 보행자로서 서울의 도심 한복판을 걷고 헤매면서,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그 시절의 공간들에 대한 감각을 내 몸 구석구석에 새겨두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표현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던'

#간식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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