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쟁취한 미완의 '시민혁명'
1987.6.10 민주항쟁
- 4.13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쟁취한 미완의 '시민혁명'
"...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의 잔재, 다시 말해 아직 날카로운 계급 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것은 (1848년) 2월 혁명 이전의 혁명적 당파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 환상, 관념, 계획들이었는데 혁명적 당파들은 2월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적 진보가 길을 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진보의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결속력 있고도 막강한 반혁명이라는 하나의 적을 만들어 냈기 때문인데,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혁명적 당파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으로 성숙해 갔다."
- K. Marx,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프랑스혁명사 3부작] 중.
칼 마르크스가 [프랑스혁명사] 3부작의 1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분석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은 나폴레옹 1세의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다시 세운 것에 의의를 두기보다, 다수 노동계급의 힘으로 세운 부르주아 공화국이 곧바로 이 다수들을 어떻게 배신하고 '반혁명'으로 돌아섰는가에 중점을 둔다.
중세 교황청의 '면죄부 매매'에 반발하여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루터가 그 이전부터 중세 교회의 부정부패를 바꾸려 했던 후스와 뮌처의 다수의지를 탄압한 사실이나 1848년 혁명정부가 뒤이은 노동자투쟁을 억압하고 분쇄한 사실, 한국의 1987년 6월 민주화투쟁이 정치적 민주화에 멈춘 채 뒤이은 7~8월 노동자대투쟁을 억압했고 2016년 촛불항쟁에 편승하여 집권한 지금의 민주당 세력이 노동자투쟁을 길들이며 적폐청산 조차도 주저하는 사실 등이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반복되는 역사적 '경향성'이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었다. 제5공화국 신군부는 한해 전인 1986년 건국대에서 개최된 이른바 ‘애학투’(주석 참고) 관련 대학생들을 대규모로 구속하는 등 민주화 열기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왔던 터였다. 이러한 시국에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자 전두환 정권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표를 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권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군부독재 연장을 위한 장기집권을 획책한다.
이에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재야세력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한 민주화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는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들불처럼 번져가게 된다.
6월 15일까지 명동성당 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 등 이후 20여일 간 전국적으로 500여만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의 슬로건으로 격렬한 반독재민주화 시위가 전개되었고, 결국 군부독재정권은 여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의 입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사무 및 금융권 노동자들도 이 대규모 민주화투쟁에 결합하면서 ‘넥타이 부대’도 노동자임을 온 세상에 선언하였고, 호헌조치를 찬성했던 당시 한국노총에서 탈퇴한 증권, 보험 등 제2금융권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대장정에 나서 결국 ‘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의 초석을 다졌다.
6월 민주항쟁은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를 뜨겁게 달구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등의 정치적 민주화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열망에 불을 지펴 이후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때부터 수많은 민주노조들이 결성되면서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전노협과 민주노총 건설로 대표되는 민주노조 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할 수 있다.
6월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인해 이른바 ‘’87년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우리 나라 정치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주요한 역사적 계기였다. 그러나 직선이기는 해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공고화했다는 한계, 정치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 쟁취에 그친 채 뒤 이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사회경제적이고 실질적인 민주주의 쟁취까지 이어지지 못한 점은 ‘미완의 시민혁명’으로서의 역사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온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 쟁취는 6월 민주항쟁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투쟁과 이 사회의 ‘혁명’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
* 주석
'애학투'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계열 대학생들이 결성한 연합체. 1985년부터 대학가에서는 반외세 투쟁을 우선하는 ‘자민투’ 계열과 반자본반파쇼 투쟁을 우선하는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계열이 남한 사회구성체를 두고 치열한 이념논쟁을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NL(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과 ‘PD(People’s Democracy;민중민주주의)’로 나뉘어진다. 건국대 ‘애학투’ 결성대회는 헬기까지 동원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해산되고 1,290여명의 수많은 구속학생을 양산하면서 학원탄압의 대명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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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칼 마르크스, 임지현/이종훈 옮김, <소나무>,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