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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Oct 03. 2020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 이태호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고구려(高句麗)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덕주>, 2020.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668년에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동북아시아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이름은 '성(城)'을 뜻하는 '구려(句麗)'와 높고 크다는 '고(高)'가 합쳐진 '큰 고을', '큰 성'을 뜻한다. 고구려 사람은 주몽설화에 근거하여 부여족에서 기원하였다고도 하며, 중국 진나라 이전의 기록에 등장하는 맥(貊)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 사람이 되었다고도 한다... 혼강 유역과 압록강 중류 및 그 지류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유적들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는 외부에서 이주해 온 주민집단에 의해 성립했다기 보다는 압록강 유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주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북쪽의 부여에서 이주해 온 주민 일부가 더해져서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건국 초부터 영역 확장을 시도하여 병합된 주변지역의 주민이 더해진 관계로, 고구려는 여러 집단의 주민으로 구성된 다종족 국가라고 할 수 있다."
- [고구려 고고학], '1. 고구려 고고학 개관',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고구려 고분벽화 스케치 - [고구려 고고학])




고구려는 원래 '고려(高麗)'였는데 구분을 위해 이전의 '고려'에 오래될 '구(句)'를 붙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문헌기록을 근거로 한 설을 따랐다. 중국에서 우리를 부르는 대로 본 것이었다. 문자는 한자였으되 우리말은 달랐을 터, '고구려'라는 나라이름은 '고을'이나 '성'을 뜻하는 '구려'에 높을 '고'를 붙여 '큰 고을' 또는 '큰 성'을 의미한다는 설을 이제서야 봤다. 지금부터는 후자의 의견을 따를 예정이다.
'이름'이란 원래, 남이 불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제대로 규정하는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막연한 '꿈'은 '고고학자'였다. 공룡을 발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한참이 지나 그 '꿈'이 잊혀진 후에도 고대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독일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이나 중동을 누빈 영국인 탐험가 '아라비안 로렌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가슴이 뛰었다. 지금도 고고학자 중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 폴 펠리오, '문헌'을 통해 미술사를 해석하는 '도상해석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 등을 동경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다.

폴 펠리오의 스승은 19세기에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한 에두아르 샤반느다. 이들은 '언어의 천재'들이라 외국어 습득에 능통했고 동양의 어려운 한자도 많이 알았다. 에두아르 샤반느는 1907년에 고구려의 중기인 4~5세기경 수도였던 국내성을 답사한 후 보고문을 남겼고 이때 처음 고구려 고분벽화가 서양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고구려 고고학 연구의 시작은 국내적으로는 1876년 요동에서 광개토왕릉비를 재발견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445년 [용비어천가] 39장에서 태조 이성계가 '확인'했다는 기록 이후의 '첫' 재발견이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엮은 [고구려 고고학]에 의하면, 고구려 고고학 연구 '제1기(1895~1945)'는 일제에 의한 '요동'과 '만주' 점령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추동되었고, '제2기(1946~1973)'는 북한의 '주체사상'적 역사작업이 주를 이뤘으며, '제3기(1974~1994)'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전초작업이 주가 되었는데, '제4기(1995~)'는 남한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과 남북 공동작업 등으로 중국 못지 않은 활발한 연구와 발표를 하고 있다 한다.





북한의 '주체사상'적 역사관은 평양을 '인류 문명의 시초'로 규정하는 '대동강 문명설'까지 정립하고 있으니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고조선과 고구려를 우리 고유의 민족국가로 굳히고 있으며, 중국의 '동북공정'은 동쪽 요동과 한반도의 고대국가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규정한다.
상반되는 이 두 시각은 역설적이게도 고구려를 한반도에 국한된 '평양 정권'으로 묶어두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한반도 삼한(三韓)을 이룬 우리 한(韓)민족도 있고,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아우른 북방 유목민족들도 있으며, 중국 대륙을 계속 통일하려던 중국 한(漢)족이 각기 따로 각 권역의 문화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따른다. 고구려의 지배민족인 '예맥족(濊貊族)'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을 중심으로 한 '요동사(遼東史)의 일원인 것이다. 고조선을 건국하고 동북방의 '선비족'과 그 아래 지방의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과 함께 요동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면서 고대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통해 한민족과 지속적으로 섞여 온 '동북아시아 공동체'의 한 역사가 고구려다.





"(고구려 미술은)... 한, 남북조, 수, 당의 중국 미술은 물론,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에 이르는 서역의 문화까지 도상(圖象)들의 수집 폭이 넓다. 고구려는 개방적인 태도로 남의 것을 수용하여 자기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자신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문화교류의 폭이 넓고 고구려의 문화역량이 대범했음을 엿볼 수 있다."
-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총론', 이태호, <덕주>, 2020.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2006년 남북공동으로 평양의 고분을 연구할 때 디지털 카메라로 수많은 벽화를 실사했고 2008년에 전시회까지 열었다고 한다. 이 실사된 '디카' 사진을 2020년 8월에 '인물풍속도 고분'인 안악3호분, 덕흥리와 수산리 벽화고분과 '사신도 고분'인 진파리와 호남리 사신총,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등으로 목차를 짜서 간단한 설명과 사진도감으로 펴낸 책이 [고구려의 황홀, 디카로 담다](<덕주>)이다.

'인물풍속도' 벽화는 4~5세기 불교의 영향으로 당시 생활상을 볼 수 있으며, '사신도(四神圖)'는 5세기 말부터 6~7세기까지 고구려 말기 도교적 지배를 추정케 한다. 소수림왕때인 4세기에 중국 전진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는 삼국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고구려 사회는 급격하게 도교의 영향이 강해진다. 기존의 지배이념을 타격하기 위함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사신도(四神圖)'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이다.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서문'격인 마지막 130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유가, 묵가, 법가, 명가, 도가, 음양가 등 '육가' 사상들의 특징과 한계점을 논한다. 이 중 '음양가'는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유물론'적 '객관성'의 장점은 인정하되, "길흉의 징조에 너무 집착하여 금하고 피하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도교'적 세계관은 노자, 장자의 '도가'와 비슷하면서도 자연만물에 기반하는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세계를 해석하고 길흉을 점치는 사상이며, 교리와 경전을 중시하는 유교나 불교 등의 종교이념에 비해 좀더 자유로운 사상일 수도 있겠으나 사마천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음양오행설'이라는 '운동규칙'에서 현실에 대한 '제약'을 보았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은 [주역(周易)](역경: 易經)과 같이 세계가 '음(陰:어두움)'과 '양(陽:밝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종교적 이분법을 기초로 하되,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오행'의 관계와 그 운동을 통해 세상이 돌아간다는 이론으로 '음양'의 기초는 [주역]과 같되 '유물론'적이지 않고 '관념론'적인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영역에 속한다. '오행'은 각각 '상극(相剋)'과 '상생(相生)'의 관계로 순환하는데, '상극설'은 '수-화-금-목-토'의 순서로 서로 밀쳐내고, '상생설'은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서로 낳아주는 관계를 맺지만, 그 해석의 근거는 다분히 임의적이다. 하늘의 '황도(黃道)'가 거치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붙박이별들과 씩씩하고 굳건하게 황도를 가는 태양과 함께 운동하는 '다섯 별의 운동(五行)'이라는 천문학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임의적 해석으로 '유물론'적인 [주역]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결국, [주역]은 '점'을 치는 책이 아니지만,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도서(圖書)'를 읽는 '음양오행설'로는 주로 '점'을 친다.
또한, 같은 '점(占)'이라도 [주역] '점'은 누구에게도 의뢰하지 않고 스스로 '덕'과 '지혜', '책임의식'과 '주체성'을 가지고 쳐야 하는 바, 반대로 '음양오행'의 '점'은 주로 타인에게 의뢰하는 것이 익숙하다.



(불교의 '사천왕')



'오행'은 각기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중앙(中央)'을 이른다. '동(東)'은 '목(木)'이요 '청(靑)색', '서(西)'는 '금(金)'이요 백(白)색', '남(南)'은 '화(火)'요 '적(赤)색', '북(北)'은 '수(水)'요 '흑(黑)색'이며, 만물을 낳는 '토(土)'는 '중앙(中央)'이요 '황(黃)색'이다. 유교의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중앙'의 '신(信)'이며, 불교의 '사천왕(지국-광목-증장-다문)'과 '중앙'의 부처에 대비되는데, 각 방향에 색깔을 입히면 '도교'적 색채가 함께 입혀진 것이리라. 예를 들어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의 얼굴이 푸르거나 북쪽 다문천왕의 얼굴이 검은 경우 말이다.



(강서대묘 '사신도' 스케치)



도교적 영향으로 유행한 '사신도' 또한 동쪽은 '청룡(靑龍)', 서쪽은 '백호(白虎)', 남쪽은 '주작(朱雀)', 북쪽은 '현무(玄武)'이며, 가운데는 '황룡(黃龍)'이다.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등장시켰으되 지상에서 가장 강한 호랑이와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을 등장시킬 때도 '신화화'된 모습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본 고구려 '사신도' 고분벽화의 표본은 평양 대동강 서쪽의 강서대묘다. 그 옆의 강서중묘는 같은 사신도라도 규모와 디테일이 약간 떨어진다.


(강서대묘 - '사신도' : 청룡-백호-주작-현무-황룡)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요동과 요서를 말달리던 고구려는 4~7세기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던 '대제국(大帝國)'이었을 것이다. 고분벽화의 선명한 붉은색과 초록색 안료를 광물 등의 자연 원료로부터 추출한 과학기술도 뛰어났을 것이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과 불교의 도상이 결합된 중앙아시아 돈황의 양식까지도 흡수한 유연한 '제국의 문화' 또한 고구려 벽화미술에서 엿볼 수 있다.



(강서중묘 - '사신도' : 청룡-백호-주작-현무)



북으로부터 5호16국과 남북조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도발이 반복되었고, 남으로부터 신라와 백제의 도전을 동시에 받던 고구려의 국제정세 속에서, 왕을 비롯한 구(舊)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군국(軍國)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중앙'의 '황룡'이 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동서남북' 사방에 '신장(神將)'인 '사천왕(四天王)'보다 강력한 '사신(四神)'을 배치할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음양오행'은 [주역]의 '주체적'인 '과학'과 달리 '타자'에게 의탁하는 경향이 다소 있다.
요동을 호령하던 대제국 고구려의 멸망은 혹시 격동의 과정에서 그들이 선택한 '음양오행설'의 한계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

1.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글/사진, <덕주>, 2020.
2. [고구려 고고학(高句麗 考古學)],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3.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가는 길], 전창선/어윤형, <와이겔리>, 2010.
4. [요동사(遼東史)], 김한규, <문학과지성사>, 2004.
5. [사기(史記)], 사마천, 김영수 옮김, <알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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