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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Oct 16. 2020

[전태일 평전](1976) - 조영래

[전태일 열사 50주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 열사 50주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전태일 평전], 조영래, <돌베개>/<전태일기념사업회>, 1976/1983/1990/2009/2020.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의 일기 중

 
현대 독점자본주의 체제 정착을 목표로 한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노동착취가 일상화되던 제3공화국 군부독재 시기는 노동해방을 주장하던 노동자 및 사회주의 세력 등이 분단과 단독정부 세력에 의해 씨가 말라 버린 상황에서 직접 착취를 당하는 노동자나 지식인 어느 누구도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를 외칠 수도 없는 암흑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 이후 20세기 말까지 민중의 힘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과 함께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가 인정할 만큼 전투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쟁취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노동자 권리에 대한 노동자 의식의 질적인 변화의 중심에 바로 전태일 열사가 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한 재단사가 근로기준법 책을 안은 채 몸에 불을 살랐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을 하였고 응급실에 실려가면서도 근로감독관에게 항의하면서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당부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젊은 삶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바친 그가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17세가 되던 1966년에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균 15세 미만의 여성 ‘시다’들이 돈이 없어 밥을 굶고 하루 14시간 이상의 장시간 중노동에 시들어가면서도 그나마의 박봉도 며칠씩 체불당하기도 하고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병에 걸렸으나 아프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해고를 당하는 참혹한 노동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바보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가 생각한 개선방향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좋은 재단사가 되어 어린 여공들을 위해 일하는 ‘온정주의’,
둘째, 정부당국을 상대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계속 진정을 하는 ‘진정주의’,
셋째, 좋은 모범기업을 만들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방법,
넷째, 노동조건 개선에 동조하는 모든 사람들을 규합하여 적극 쟁취하는 ‘적극 투쟁주의’였다고 [전태일 평전]을 쓴 인권변호사 故조영래 선생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온정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 노동조건 개선에 한계가 있었고, 두 번째 ‘진정주의’ 또한 정부 당국과 노동청(당시 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수 차례 진정을 하였으나 기만당하기 일쑤였으며, 세 번째 모범기업은 당시 재단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3천만원 정도 거액의 자본이 필요한 것으로 예상되어 꿈에 그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청계천 평화시장을 떠나 삼각산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하던 4개월 동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갔던 1970년 9월에 부득이하게 네 번째 ‘적극 투쟁주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故조영래 변호사는 말합니다.
 
1970년 9월, 다시 청계천 평화시장을 찾은 전태일 열사는 무너진 ‘바보회’ 시절 동료들을 다시 규합하면서 ‘삼동친목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변모시킵니다. ‘바보회’와 달리 ‘삼동친목회’는 노동조건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신문에 평화시장의 실상을 알리는 기사가 게재되도록 하는 등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태일 열사는 자신이 위편삼절하듯 읽었던 [근로기준법]은 현실과 괴리된 채 사문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게다가 ‘삼동친목회’에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준비한 집회도 정부당국과 경찰, 기업주로부터 저지당하는 과정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려고 하던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책을 안은 채 자신의 몸에 불을 놓게 됩니다.



이후, 전태일 열사가 살아 생전 [근로기준법]을 혼자 연구하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라고 아쉬워 했던 그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하여 즉각적으로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청계천 평화시장에 남은 동료 노동자들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故이소선 여사는 열사의 유지를 이어 투쟁한 결과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 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는데 유신독재와 신군부 독재 시기였던 1970~80년대 노동운동의 선봉에는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있었습니다.
 
2020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지 5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우리 노동계는 매년 이날을 기념하여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합니다.

11월 13일은, 나와 내 이웃의 삶과 권리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야 하는 바로 그 날입니다.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나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 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 1969년 9월, 전태일의 수기 중


***


- [전태일 평전], 조영래, <돌베개>/<전태일기념사업회>, 1976/1983/1990/200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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