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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pr 02. 2021

[제왕의 스승, 장량](2008) - 위리/김영문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보다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보다

- [제왕의 스승, 장량](2008), 위리,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한 고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와 항우가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성이 있느냐, 참을성이 없느냐의 사이일 뿐이다. 항우는 참을성이 없었기에 백전백승하면서도 그 예봉을 경솔하게 사용했다. 한 고조는 참을성이 있었기에 자신의 온전한 예봉을 기르며 항우가 피폐하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장량이 가르친 것이다. 회음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고조가 분노하여 말과 표정에 그 기색이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도 고조에게는 아직 참을성이 없고 강하게만 대처하려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량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한 고조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 소식, <유후론(留侯論)>, 김영문 옮김, [제왕의 스승, 장량] 부록.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후, 대가 끊긴 나머지 6국은 진시황제를 몹시도 증오했다. 불멸을 쫓던 시황제는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형가와 고점리 등의 자객들의 암살시도는 실패했으나 망국의 신하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한(韓)나라 재상 집안 출신 공자였던 장량(張良)은 동쪽을 순행 중이던 시황제를 박랑사라는 곳에서 테러하려다가 실패하고 하비로 숨어드는데 용케도 잡히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전국은 오랜 기간 대수색령이 내려진다. 훗날 한 고조 유방의 제일 참모로서 한(漢)나라 건국 '삼걸' 중 하나로 거론되는 장량이 단순한 복수의 테러리즘을 넘어 개국(開國)의 정치강령으로 무장한 시기가 바로 이 하비에 숨어살던 수배시절이다.

"장량이 있었기에 유방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한 북송시대 시인 소식은 <유후론>에서 장량(유후)이 수배시절에 만난 '황석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태공병법]만이 아니라 '참을성'이었으며, 이로 인해 동네건달이었던 한 고조 유방(劉邦)을 위대한 개국황제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흔한 말로, 유방이 장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훗날 조선의 삼봉 정도전도 술에 취해 태조 이성계가 본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태조를 이용해 조선을 건국했다고 말했듯이.

이렇게 각 시기 최고의 참모들은 '참을성'과 끈기있는 정치강령으로 당대의 '주먹들'을 '선택'했다.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다. 역대의 영웅들은 최고의 참모를 '나의 자방'이라 불렀단다. 조조가 순욱을, 주원장이 유기를 그리 불렀는데, '장자방' 장량은 역대 모사들의 대명사다. 유비의 참모 제갈량도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으나 천하통일 전쟁에서 늘 장자방을 롤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실로 '삼국연의'는 '초한지' 이야기가 비슷하게 반복되는 구전이 바탕인데, '삼국지' 이야기에서 '자방'은 단연 제갈량이다. 물론, 천하통일을 완수한 장량과 통일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비장하게 생을 마감한 제갈량은 비교가 안될 수도 있겠다지만, 장량의 주군이었던 유방은 '용인술'의 대가로서 소하와 한신, 장량 등 '삼걸'을 두루 기용한 반면, 제갈량은 무능한 유비 밑에서 위 '삼걸'의 일을 혼자 다 감당해야 했다. 장량은 말년에 도인이나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결국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장량은 단연 중국역사상 최고의 참모로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방략을 품고 계획을 구상하여 신묘한 계산으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고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면은 짐이 장자방보다 못하오. 백성을 위무하고 나라의 재산을 잘 관리하면서 물자를 제때 공급하여 군대를 구제하는 면은 짐이 소하보다 못하오.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이기는 작전과 지휘의 본령은 짐이 한신에 미칠 수 없소.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은 모두 세상에 드문 기재(奇材)요. 짐은 비록 이들보다 못하지만 이들이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했소. 이 점이 바로 짐이 천하를 얻은 원인이오."

- [제왕의 스승, 장량], <6장. 국가>, 위리.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공신들에게 분봉을 하면서 본인이 '서초패왕'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들며 건국 '삼걸(三傑)'로 소하와 한신, 그리고 장량을 꼽는 대목이다. 수도에서 국가운영을 이어가며 전선에 군량과 병력을 지원한 영원한 승상 소하, 중원의 삼진과 제나라의 동북방을 평정하며 유방에게 지원병력을 쉼없이 제공한 대장군 한신은 말할 것 없고 군막 안에서 천리 밖 전장의 계책을 마련할 뿐 아니라 중요한 시기마다 기묘한 책략으로 유방을 구한 장량이 한나라 건국에 가장 크게 기여한 3명의 인재라는 의미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0



중국 작가 위리(본명, 바오광리)가 쓴 [장량전]은 사마천 [사기(史記)]의 <고조본기>와 <항우본기>, 장량의 열전인 <유후세가>, 한신의 열전인 <회음후열전> 등의 '원문'들을 기초로 장량의 일생을 그린 일종의 '장량 평전'이다. [사기]나 [초한지]로만 볼 수 있던 '모신' 장량의 모습을 오롯이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없던 '장량전'을 올해 김영문 선생이 번역했는데, 중국고전 전문가인 역자의 번역은 믿고 읽을만 하다.


처음에는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진시황에게 복수만을 다짐했던 장량은 공자의 땅에서 '예학' 즉 유학을 배우기도 했고 우리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명사인 '창해군'의 문객이 되기도 했으며 수배시절 '황석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후 '도가'의 사상까지 흡수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점차로 통일국가 건설의 프로그램을 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유현 땅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방과 친교를 맺은 장량은 본인이 깊이 수련한 방책들을 유연하게 흡수하여 실현시키던 유방의 큰 그릇에 감복하여 결국 천하쟁패의 '초한전쟁'이라는 건곤일척의 전선을 긋고 기묘한 책략으로써 유방을 최후의 승자로 만든다.

관중땅에 처음 들어가 '약법삼장'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한 것도,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관중으로 물러나 몰래 힘을 기르게 한 것도, 역이기의 '6국 봉건제'를 깨고 '중앙집권군주제'의 대세를 설파한 것도, 홍구의 협약을 깨고 항우의 뒤를 쫓아 끝장낸 것도 모두, 장량의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을 내다본 계책이었다. 장자방이 없었다면 한 고조 유방의 대업도 불가능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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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은 과연, 시대를 앞서간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이다.





"요컨대, 이 책의 목표는 역사의 다양한 시점에서 왜곡된 유방의 행적을 사료에 입각하여 재검토함으로써 역사의 실상에 접근하는 데 있다. 유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서민황제였다. 서민이었을 때 황제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비극이 기다리게 되고, 황제가 되었을 때 서민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게 된다. 사회계층의 밑바닥으로부터 정점으로 치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유방은 자연스럽게 또 의식적으로 그 행동양식을 바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역사서술은 그 과정에 있었던 모순을 지워 없애고 그것을 순조로운 이행과정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 [유방], <서장 - [사기]에 대하여>, 사타케 야스히코.



일본의 중국문학자 사타케 야스히코는 2005년에 한 고조 유방의 '평전'을 냈다. 이 역시 [사기]와 [초한지]의 주역으로서의 유방보다는 유방이라는 인물을 더욱 중심에 둔 책인데, 특이한 점은 [사기]의 <본기>와 <세가>, <열전> 등에서 각기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는 유방의 모습을 통해 더욱 입체적인 그만의 평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장량은 유방 진영 최고의 참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리 인상깊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유현 땅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도 [장량전]에서는 장량의 입장에서 주요하게 묘사된 한편, [유방전]에는 한 페이지의 서술에 불과하다.


사타케 야스히코는 [유방]의 <서문>에서 [사기]의 특징을 짚고 시작한다. 즉, 한나라 건국 후 역사가 육가가 [신어]를 지은 것처럼 패현의 서민건달 유방이 원래부터 기이한 풍모로 '천자'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조금씩 건국자로서의 모습을 갖추면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사기] 특유의 씨줄과 날줄의 서술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조본기>는 유방의 입장에서, <항우본기>는 항우를 중심으로, <회음후열전>에서는 억울하게 토사구팽 당한 대장군 한신의 관점에서 유방의 행적을 서술함으로써 인간 유방에 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평전'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신의 군권을 회수하던 장면은 <고조본기>에서는 담담하게, <회음후열전>에서는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으로 쓰고 있다. 초한전쟁 동안에도, 한나라를 개국한 후에도 끝끝내 한신을 두려워했던 유방 입장에서 정당하던 '군권 회수'가 한신의 입장에서 보면 강도짓에 다름 없는 것이다.

사타케 야스히코의 입체적 유방 평전인 [유방]은 역동적인 '초한(楚漢)전쟁'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6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 한나라가 멸망함에 미쳐, 만금의 재물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력한 진나라에 복수하려 했고, 이 일로 천하가 진동했다. 지금 세 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었고, 만호후에 봉해졌고, 제후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한에 오른 것이다. 나 장량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을 따름이다."

- [사기], <유후세가> 원문, 사마천, 김영문 옮김.



'황석노인'은 전국시대의 유세가 소진과 장의를 가르친 '귀곡자'였을 수도 있고, 수배시절 '도가'와 융합한 장량의 대전환기에 관해 후세 사람들이 갖다붙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태공병법] 또는 [육도삼략] 등을 통해 유가와 도가 등을 융합한 장량은 이미 천하통일의 새 시대가 오면 속세를 떠나야 끝이 아름답다는 이치를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하는 승상으로서 제 명대로 살았으나 황제가 되어 교만해진 한 고조 유방에 의해 감옥에 갇힌 적도 있고, '다다익선'의 대장군 한신의 숙청은 말할 것도 없다. 장량이 초한전쟁의 대전선을 긋고 유방 진영의 한편을 만들었던 구강왕 영포와 양왕 팽월도 반란의 혐의 또는 실제 반란으로 몰려 숙청 당하고 말았다. 번쾌와 조참 등은 천수를 누렸으나 함께 호의호식했던 진평은 일평생 '음모'와 속임수에 능한 '모사꾼'으로 남았다.

한(漢)나라 공신 그 누구도 풍족한 제나라 3만호 봉읍을 거절하고 유방을 처음 만난 유현땅의 1만호에 만족하며 '적송자'를 따라 노닐다 속세를 떠난 장량에 비할 수는 없다.


이 장면이 바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빛나는 장량이 역사 속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장량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일찍이 깨달았고, 그 장대한 책략에 따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다간 잔잔하지만 큰 '바람'이었다.



위리의 장량 평전, [제왕의 스승, 장량]의 원제는 [장량전:풍신모사(張良傳:風神謀士)]이다.



***


1. [제왕의 스승, 장량(張良傳:風神謀士)](2008),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2. [유방(劉邦)](2005),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7.

3. [사기(史記)],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4.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5. [이문열 초한지], 이문열 지음,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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