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의 '빛과 그림자'
[중용(中庸)]의 '빛과 그림자'
-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사우>, 2019.
"[중용]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었다. 이 책은 시초부터 '이념투쟁의 도구'로 설계되었다... 유교는 초기 단계부터 사상적 적수를 만났다. 최초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파하는 도가(道家)와 충돌했다. 곧이어 농가(農家)와도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들은 스스로 재배하고 제작한 도구만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극단적인 자급자족주의자들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겸애설(兼愛說)'을 펴며 유교의 차등적 예법을 공격하는 묵가(墨家)와의 대결도 수월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엄격한 형벌로 사회 기강을 세우려 한 법가(法家)와도 일전을 벌였다. 나중에는 불교와의 사상적 대결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에필로그 - 21세기 중용의 새로운 해석을 위하여>, 백승종, 2019.
중국 남송의 주희는 유교의 경전을 철학적으로 집대성한 '성리학(性理學)'의 대표학자로서 '공자'나 '맹자'처럼 '주자'로도 불린다. 주희의 선학들인 북송시대 주돈이, 정호/정이 형제('정자')로부터 정립되기 시작한 '성리학'은 유교 경전을 '4서 3경'으로 정리했는데, '4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고, '3경'은 [시경], [서경], [역경(주역)]이다. 율곡 이이는 '4서' 중 [대학]을 제일 먼저 읽고 그 다음으로 [논어]와 [맹자]를, 가장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으라고 했단다. 기원전 1세기 중국 한나라 때부터 전해졌다는 [예기]에 포함되었던 [대학]과 [중용]이 '4서' 공부의 처음과 끝이 되는데, [대학]은 현실 정치에서 '지도자' 또는 '군자'로서의 소양을 '3강령 8조목'으로 정리한 제일 앞선 '큰 학문'인 한편, [중용]은 우주와 자연의 '본성'에 관한 방대한 철학사상으로 가장 추상적이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용]은 '이념투쟁의 도구'가 될 만큼 고도로 추상화된 형이상학적인 철학경전이 되었다.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중용]을 주제로 조선시대 사상계의 흐름을 엮어서 소개한다. 제목은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2019)이다. [중용]은 한 국가를 '바꿀' 정도로 어렵고 난해한 책인 것이다.
조선은 고려말 신진 사대부들이 당시 부패한 지배이념으로서 불교를 반박하는 '진보이념'으로 '성리학'을 앞세우면서 개창한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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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은 공자와 맹자 등의 춘추전국시대는 철학, 종교, 도덕, 예법 등을 아우른 사상이었는데 주희의 '성리학'에 이르면 불교나 도교 등과 지배이념의 자리를 다투는 '종교'적 지위로서 '유교(儒敎)'가 된다.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국가의 운영사상이 된 '유학'은 1천 년 동안 진화발전하고 고도로 추상화되면서 송(宋) 대에 이르러 '유교'로서 '성리학'의 모습을 갖춘다. 우리의 고대 삼국시대에도 '유학'은 성행했으나 '성리학'이 도입된 때는 고려말이었고 당시 한반도에 들어온 '성리학'은 유학의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한 '진보이념'이었다. 정도전을 위시한 급진적 신진 사대부는 '4서3경'을 완벽히 체득하고 진보적' 성리학으로 무장한 '선비'들이 지도하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실제로 정도전의 목을 베고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한 후 절대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태종 이방원도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선비 왕'이었다. 세종이 학문을 육성한 '학자 왕'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계유정난'의 세조가 [중용]을 매우 중시한 왕이었다는 지점에 이르면 대략 짐작이 된다. 피묻은 왕좌에 오른 자였다 하더라도 조선은 전세계 유례 없이 '성리학'을 공부한 왕을 세우고자 했고,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왕일 수록 [중용]을 강조했으며, 이는 [중용]이 그만큼 '유교'에서는 최상의 경지를 은유한다는 것을 말이다. 성종 대에 이르면 유교는 지배집단 내에서 [중용]을 집단학습하면서 도교와 불교를 조정에서 몰아냈다. 이후 격렬한 유학자들의 '당쟁'과 '사화', '환국'을 거치며 조선의 '성리학'은 수구보수, 반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역사 속 지배이데올로기의 필연적 현상이다. 영조와 정조에 이르면 아예 왕 스스로가 최고의 '선비'나 '학자', '군자'나 '스승'을 자처하며 선비들과 사대부를 가르치려 들었고, 그로 인해 '개혁군주'라 평가되는 정조는 수구 성리학 이념에 미쳐 문체반정으로 다양한 사상의 활로를 막기도 했다. 그런 자가 썩은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는 '왕'을 처형했음은 물론 '왕정' 자체도 폐기해 버렸다. 다수 민중의 힘으로 처단하지 못한 '왕의 나라' 조선은 또 다시 '세도정치'라는 소수 기득권 동맹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이 또한 역사의 필연이다.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14세부터, 청나라는 건륭대제부터, 조선은 '개혁군주' 정조대왕부터 이미 망조가 들었던 것인데, '왕조'가 다수 민중의 힘으로 무너진다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한 그들만의 '르네상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망한 시도들은 잘 해봐야 결국 망한다.
"중(中)이란 '치우치지 않음'이다. 용(庸)이란 '언제나 일정한 것'이다. '치우치지 않은'은 동정(動靜)을 겸한 것이요, '일정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한 것이다... 이른바 '중용'이란 정밀하고 은미한 '천명(天命)'의 본체다. 이 때문에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 백호 윤휴, <중용장구보록>, 백승종, [같은책] '4장' 재인용.
공자의 수제자인 증자로부터 배운 공자의 손자 공급의 자는 '자사(子思)'인데, 애초 [예기]에 수록된 [중용]을 지은이가 바로 '자사학파'라고 한다. [중용]은 2천4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기록인데, 주희가 [중용장구집주]라는 방대한 주석과 편집을 통해 '4서' 중 하나로 선포했단다. 물론 이전부터 [중용]이 주요 유교경전 텍스트로 인정된 사례도 많다지만,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의 17세기에 이르면 '주자'의 해석에 이의를 다는 선비는 '이단', 즉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었다. 역시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6세기에 도학정치를 지향했던 정암 조광조의 뜻이 꺾인 후, 사림들은 각지에 숨어 학문에 몰두했고 [중용]에 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했지만, 왜란과 호란 이후 체제 위기에 처한 17세기 조선의 지배집단은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했고 '마녀사냥'을 일삼았다. 조선의 '주자'인 '송자'를 자임했던 송시열은 그토록 칭찬해 마지않던 백호 윤휴가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와 다르게 [중용]을 공부하고 해석하자 10살 연하인 윤휴가 사약을 마시게 만들었고, 그 외 [중용]에 관한 다양한 해석자들을 정적으로 만들었다. '송자' 송시열은 [중용]의 다른 해석을 관용했던 명재 윤증과 척을 지고 집권세력인 서인당파를 '노론'과 '소론'으로 나눴다. 늙은 송시열을 따른 자들은 '노(老)'론, 젊은 윤증을 따른 자들은 '소(少)'론이 되었다. 노/소론 분파의 계기 또한 [중용]이었는데, '어느 한 곳에 치우침 없이(중:中), 항상 일정함(용:庸)'의 가르침과 달리 수구지배세력은 '주자'의 뒤에 숨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중용]을 해석했다.
"사람다운 사람인 인격자(군자)는 중용을 지키고 실천한다...
지성인의 중용 실천은 교육받은 사람답게 '때와 장소, 처지와 상황에 따라 알맞게' 한다.
군자중용(君子中庸)...
군자지중용야(君子之中庸也),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
- [중용(中庸)], <2장>
한국철학교수 신창호 선생이 편역한 [사서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2018)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4서(四書)'의 원문과 번역문을 담고 있다.
'천명'이 만물의 '본성(性)'이고, 이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며, 그 '도'를 지키는 것이 '문화'적 가르침(1장)이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하여, 희로애락 이전 순수한 '천하의 큰 근본'인 '중(中)'과 인간세상에서 '도에 다다른' 상태인 '화(和)'로서 '중화(中和)'의 경지에 이른 상태에서(1장), '배우고(學), 묻고(問), 생각하고(思), 따지고(辨), 독실하게 실천(篤行)하는 삶(20장)을 지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혼자 있을 때도 삼가는(戒懼愼獨)'군자'의 길은 '그 작용이 밝아서 쓰임이 넓고 그 본체는 은미하게 숨겨져 잘 드러나지 않지만(費而隱)(12장),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인/용(智仁勇)을 기르면(20장), '자연스러움과 명백함('誠明)'이 하나가 된다(21장).
내가 보기에 위와 같은 '중용'의 길에 가장 중요한 결론은 '시중(時中)'인데, '군자의 중용'은 '때와 장소, 처지와 상황'에 따른 '알맞음'이다. 공자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 '우주의 본성'과 '시중'을 신분제로 해석하고 확정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 시대의 '중용'이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철폐된 현대의 '중용'은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본성'을 지키는 것 아닐까 한다.
이 자체에 [중용]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데, 그렇게 "중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것이고, 용은 변하지 않는 일상생활"(신창호, 같은책, <4권-중용>)의 의미로서 '중용'은 조선을 너머 현대에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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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사우>, 2019.
2. [사서(四書)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대학/논어/맹자/중용)], 신창호 편역, <나무발전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