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츠비의 '미래'와 콜필드의 '과거'
개츠비의 '미래'와 콜필드의 '과거'
-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 /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 [위대한 개츠비], <1>, 스콧 피츠제럴드, 1925.
미국 대선을 지켜보면서 거대 양당제의 과두지배적 정치체제가 사실, 한심했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다시 지배당하고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초대 대통령은 한참 후세인 내가 보기에 웃기지도 않았는데 더 중요한 건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정치도 미국의 '양당체제'가 이식된 것이 나는 더 슬펐다. 공화당은 '보수', 민주당은 '진보'라는 식의 수사가 우리의 '양당제'에도 그대로 이식되기를 우리의 지배자들은 바랬겠지만, 적어도 '정의란 무엇인가?' 묻는 마이클 샌델 식의 '공화주의적' 자부심이란 게 미국의 '보수'에게는 있었겠지만, 그건 '왕정'을 겪어보지 못한 미국인들의 역사일 뿐, 우리나라 '보수'는 할 수만 있다면, 즉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정'을 선택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역사가 깊은 유럽의 '보수'들처럼 말이다.
19세기 유럽의 과학적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이미 미국식 양당 정치체제를 두고 "도둑놈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바꿔먹는 정치체제"라 논평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대선을 통해 20세기를 지배했던 제국의 몰락을 본다. 이유는, 코로나도 경제위기도 아니다. 바로 빌어먹을 '양당제'다.
1920년대라면, 아마도 미연방공화국의 최대 전성기의 시작과도 같은 시기였을 텐데, 1차 세계대전 후 세력들이 재편되는 유럽을 제끼고 미국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학창시절에 관련 공부는 커녕 관련 소설책도 제대로 읽어본 기억은 없다. 그래도 '20세기 영미소설' 하면,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미국의 스콧 피츠제럴드와 샐린저 등은 어깨 너머로 들어봤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야 피츠제럴드와 샐린저를 읽었다. 사치스런 행각으로 유럽을 넘나들던 피츠제럴드는 유럽의 조이스와도 친분이 있었고, 미국의 샐린저와도 친했다고 한다.
( [조이스와 그의 친구들], 스콧 피츠제럴드, 1928. )
1896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1920년 첫 소설 [낙원의 이쪽]의 대성공으로 상류층의 딸 젤다와 결혼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1896~1940)는 호화파티와 유럽여행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소설을 썼다. 부인 젤다는 정신병을 앓았는데 그녀 또한 소설을 썼고 아마도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소설을 질투했을 수도 있고 파경을 겪으면서도 그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라는 아주 얇은 '대작'을 남겼다. 그의 살아 생전에는 책의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대성공까지는 못했다 하나, 1940년 알콜중독과 심장마비로 그가 사망한 후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 중서부 상류층인 닉 캐러웨이는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다. 그는 나서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성격인데,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말한다. 당시 성장 사업이었을 '드럭스토어(편의점/잡화점)'를 통해 부자가 된 1차대전 참전군인 '제임스 개츠'는 자신의 과거를 베일에 가린 채 이름을 '제이 개츠비'로 바꾸고 첫사랑이었던 상류층 딸 데이지의 인근에 화려한 대저택을 갖추고는 유명인사들을 꼬이는 호화 파티를 열면서 데이지를 기다린다. 개츠비의 이웃인 화자 닉은 데이지와의 친분이 있었으므로 개츠비의 '친구'가 된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화자 홀든 콜필드의 말을 빌어 말끝마다 "친구" 또는 "형씨"라 붙이는 개츠비식 말투를 높이 평가하는데, 아마도 당시 성장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고지식한 격식을 벗어나는 '미래지향적' 어법으로 본 듯 하다. 사실상 근본이 '유럽인들'이었던 미국인들은 상류층이 득세하면서 '유럽'의 '귀족'적 격식을 갖추고자 했을 텐데, 이 가식적인 상류사회에 '미국식' 벼락부자 개츠비가 끼어들어 과거는 잊고 모두를 "형씨"라 부르며 반말을 까는 거다. 소설가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동년배 사이의 존대를 없애고 다 현대식 '반말까기'로 번역했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미국식 '미래지향적' 반말까기였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호밀밭의 파수꾼], <22>, J.D.샐린저, 1951.
스콧 피츠제럴드의 '친구'였다는 제롬 데이빗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1919~2010)는 1951년에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라는 아주 정신없는 소설을 썼는데, 이 역시 20세기 미국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영문학'을 '전공'하던 스무살에 읽었다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이나 우리의 소설가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1996),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등에 못지않게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는 별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나아가 왜 '위대한' 미국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몇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거나 정신놓고 출근하다가 큰길에서 발목을 삐기나 할 뿐이다.
1920년대에 성장하는 미국의 '미래'를 보여줬던 [위대한 개츠비]를 정신나간 와중에도 높이 사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는 여러 상류층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학을 거듭하면서 뉴욕의 상류층 부모를 실망시키고 헛소리와 정신분열을 거듭하다가 결국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 어린 여동생 피비에 집착하는 그는 아마도 호밀밭에서 어린이들이 절벽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미래'가 아니라 단지 그의 '과거'일 뿐이다. 실제로 소설 내내 화자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도 샐린저는 '매카시즘(광신적 반공주의)' 같은 1950년대 당시 미국의 신종 '전체주의'로부터 일탈을 꿈꾸며 그 시대풍조를 비틀기 위해 '성장이 멈춘' 청소년 홀든 콜필드를 화자로 내세웠는지 모르나 '괜히 읽었나' 싶다가 발목이나 삐어버린 중년 노동자인 나로서는, 좀더 어렸을 때 읽을걸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1922)까지만 읽고 '영미소설'은 그만 접을까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인 홀든 콜필드식으로 말한다면, "뭐 그렇다고 아주 나빴던 건 아니었다. 단지 난 괜히 읽었나 생각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뿐이고 그때문에 기분을 잡쳤는데, 그렇다고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냥 내 나이가 백만살 정도만 더 젊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후세들은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기저귀를 벗자마자 바로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는 정도로만 해두자.
다시 미국 '양당제' 얘기로 돌아오면, 20세기의 이 거대한 '제국'은 '공화주의'적 '양당제'로 흥했으나 이 과두지배체제로 이제 몰락하고 있다 말하고 싶다. 99% 다수의 운동도, 인종차별에 대한 극렬한 투쟁도 이 '도둑' 같은 '양당제' 정치체제로 편입되면 체제전환을 기획할 수 없다. 다수의 역동성을 잠식하고 무력화하는 이 거대양당의 과두지배체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이를 깨달았으면 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죽은 개츠비 곁에서 '친구' 닉 캐러웨이는 '과거'를 딛는 '미래'를 애써 그리지만,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의 '미래'는 더 이상 영광스럽던 '공화주의'적 '과거'의 그 모습이 아니다.
체제변혁의 판단을 '유보'한다고 해서 희망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위대한' 개츠비와 그 친구들이 이미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지 않았는가.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9>, 스콧 피츠제럴드,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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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대한 개츠비](1925),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2009.
2.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3.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4. [새가 되었네], 성석제, <강>, 1996
5.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