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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20. 2021

[단편 습작](1997) - 송용원

[그녀, 속눈썹이 유난히 길던] - 1997. 12.

[그녀, 속눈썹이 유난히 길던] - 1997. 12.

 



"기존 현실의 내용은 새로운 형태로의 자기전환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그 전환은 그것이 우연적인 실재가 현실적으로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에서의 '필연적 과정'이다."

- H. Marcuse, [이성과 혁명]



1.


얼마쯤 지났을까.

언제나 복귀하는 버스는 심하게 흔들리는 듯 하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으로 올라타게 된, 살아가면서 다시는 올라타고 싶지 않을 것만 같은 붉은색 철원행 직통버스는 이 순간 유난히 더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바지 건빵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접어서 넣어두었던 오늘자 <한겨레> 신문 쪼가리는 떠들쳐보지도 않은 채 버스에 오르자마자 애줄없이 눈을 감아버린 터였다. 그리고 나서 머릿속 의식의 통로를 열어두었더랬다, 그 어떤 생각이든 기억이든지간에 무시로 그의 열려진 머릿속을 통과해 지날 수 있게, 그리하여 결국 머릿속에 아무런 앙금도 가라앉음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눈을 뜰 수 있게.

그러는 와중에도 얼핏 쌍문동 근처를 지나고 있음을 확인했던가. 수유 시외버스 터미널을 출발하여 어느 정도의 시간을 예의 그 열려진 통로로 흘러보낸 것 같은데 문뜩 눈을 떠보니 이제 막 도봉동을 벗어나고 있다. 아무런 여과없이 모든걸 그냥 쉬이 흘려보낸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렇게 지나보낸 것들은 그의 기억 속에 남겨지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럼에도 아직, 서울이다. 버스의 심한 흔들림은 시나브로 그의 의식에까지도 강한 요동을 야기하기에 이르렀고 아직 서울에 남아있는 그, 다시금 눈을 감는다, 여전히 의식의, 기억의 통로를 열어둔 채로.

 


2.

 

미묘한 느낌.

아니, 이런 표현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어떤 것.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은 뭐 그런 것이었다. 아무것도 쥐고있지 않은 그녀의 손을 그는 어색하리만치 꼭 잡고 있었고, 그 손에서는 예사롭지 않게도 연신 땀이 배어났다. 그렇게 그들은 이제 막 겨울의 얼어붙은 때를 벗어낸 종로의 골목 어귀어귀를 어빡자빡 헤매다녔고 회색이나 청백색 헬맷의 군화발 소리에 쫓겨 정신없이 뛰었다. 그 순간에는 그녀도 땀이 축축하게 밴 그의 손을 꼭 잡곤 하였지만 그리고는 아무말도 없던 그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여섯이 넘는 식구들이 방 한 칸 마련할 만한 충분한 보상도 없이 그들을 거리로 내쫓는 문민정권의 비인간적 도시 재개발 정책에 대해 그는 얘길했고, 그로 인해 쫓겨나는 철거지역 주민들의 막막한 생계의 이면에는 이땅 자본가들의 짭짤한 이윤의 법칙과 그에 부합되는 정권의 기만적인 정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그런고로 우리 살고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은 결국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고 그만큼의 존중을 받아야 할 존재인 '인간'보다는 자본의 이윤추구라는 '물질'적 요소만이 우선시되고 있는 세상이라는 얘기, 세상이 그럴진대 이 세상사람 그 누가 있어 우리의 유물론을 '물질주의'로 매도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럼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합리적인 시각, 철학적 전제는 인간의 사유보다도 객관적으로 우선 존재하며 전자를 본질적, 태초적으로 규정해주는 '물질'일 수 밖에 없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한 얘기들…….

예사롭지 않게 손아귀를 적시던 땀에 의아스러워하고 자못 신경을 쓰면서도 그는 선배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새삼 각인하며 이런 저런 얘기들을 그녀에게 해주었고 그녀는 여전히 손에 힘을 주지 않은 채 선배에게 손을 맡기고선 그들의 주변으로부터 멀찌감치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아무말 없이. 그날 이후, 그녀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보고 그녀에 대한 자신의 이상스런 반응을 확인하던 그 첫 날 이후로 그는 어느 거리에서건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하기야 신상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 가두시위에 신입생들을 데리고 나가 선배로서 보호해준답시고 손을 잡았던 것이었으니 그녀의 애인이 아닌 이상 그가 그날 이후로 그녀의 손을 잡아줄 이유가 없었긴 했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선배가 되었던 그 이전 해에도 갓 들어온 신입생들의 손을 잡고 대학로로, 종묘로, 명동성당으로, 그리고 서울역에서 국회의사당 등지로 걷고 뛰고 했었더랬지만 한번도 그토록 손에 땀이 배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때그때 시위의 성격, 당시의 정세분석에 대한 의견을 후배들과 나눌 때에도 뒤를 쫓는 방독면들이나, 머리위, 혹은 다리밑에서 흩어지는 희뿌연 최루연기 외에는 별다르게 신경쓰이는 게 없었는데…… 또 한번 선배가 되어있는 그의 손엔 왜 그토록 땀이 배었던가.


속눈썹.

아마도 정리집회나 뒷풀이때 그녀로부터 형은 땀이 많이 나나봐요, 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건 그녀의 유난히 긴 속눈썹 때문이었으리라.

 


3.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어찌 보면 모든 걸 다 알고있어 옆에서 지껄여대는 선배에게 내심 조소를 보내고 있는 듯도 하고 또 어찌보면 백치마냥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무뚝뚝한 표정. 그러다가 가끔씩 올려다 보는 도도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초점이 전혀 없는 것 같기도 한 눈빛……. 그녀의 읽어내기 힘든 표정과 눈빛의 중심에는 항상 긴 속눈썹이 있었다. 흔히 보기 어려운 긴 속눈썹이.

신입생들을 맞고 여러 차례 그들을 만나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는 그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뛰어나갔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몇몇 후배들을 추려 세미나 따위를 했었다. 기껏 [공산당선언] 하나 읽고선 자본주의를, 나아가 남한의 변종적 자본주의까지를 모두 간파해낸 듯 설치던 후배, 변변한 책 한권 제대로 읽지도 않고 매번 세미나 준비도 제대로 못하면서 거리로, 거리로만 뛰쳐나가던 후배……. 그러나 그들 모두까지도 그의 눈에는 순수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모습들이었다. 그런 반면에 몇 번의 세미나도 해보지 않고, 최루연기 몇 번 맡아보지도 않고선 선배들 곁을 떠나던 후배들도 있었다. 그의 눈에는 백지 같아만 보이던 신입생 후배들은 선배들 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변화된 모습을 하고서는 그의 앞에 나타나곤 했다. 신입생들이 으레 들고다니던 [철학에세이], [역사에세이] 등 에세이 부류의 사회과학 입문서가 아니라 전공서적이나 토플, 토익 따위를 품에 안고 도서관을 오르는 모습이나 꽤 세련된 여학생을 옆에 끼고 교정을 걷는 모습, 또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게 인위적으로 속눈썹이 길어진 모습으로.


어느날이었던가. 그는 아침에 부시시 잠을 깬 누나의 얼굴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공휴일은 아니었던지 집에는 누나와 그, 둘 뿐이었고 그의 누나는 일찍 일어나 앉아있는 그를 보자 하품을 하며 아침은 먹었느냐고 물었었다. 오후 1시가 훨씬 넘은 시각, 아침식사는 커녕 점심식사까지도 걸른 그는 누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만 가로저었고, 그제서야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갑자기 허둥대며 전기밥통을 열어보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그러는 그녀의 옆모습까지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는 공연스레 놀라고 말았다. 그때, 누나의 속눈썹은 너무나 짧았던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낯모를 여자들도, 그가 항상 보아왔던 그의 누나도 속눈썹은 참으로 길었고, 그는 자신의 속눈썹을 여러번 거울에 비추어보며 원래 여자들은 남자보다 속눈썹이 길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밥통에 남은 밥이 없음을 알고 서둘러 쌀을 씻고있는 방금 잠에서 깨어나 부시시한 누나의 속눈썹은 그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그는 여자들이 화장을 할때 모조 속눈썹을 붙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는 예뻐보여야 하고, 그래서 으레 나이가 찬 여자들은 그렇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해야 하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강압적 요구로 인해 거의 모든 여자가 그렇게들 해야만 하는 일종의 시류, 그 시류에 늦춰지지 않기 위해선 그 만큼이나 속눈썹이 길어야 한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난 후 속눈썹이 길어졌던 후배들의 모습은 바로 세상에 길들여지고 그에 맞게 점차로 변화되어가는 그런 모습의 단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선배들로부터 등을 돌린 후에 하나같이 속눈썹이 한껏 길어진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몇몇 후배들은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에게 고개만 꾸벅하고 멀어져가곤 했다. 총총히 사라지는 후배들의 뒷모습에서 그들은 세상 속으로 계속 걸어들어가고 자신은 그저 세상의 변두리에만 머물러있는 듯한 종작없는 아득함마저 느껴져 재빨리 가던 길을 재촉하던 기억. 그리고 가끔씩 그의 뇌리속을 진하게 훑고 지나던 생각. 그녀, 화장을 전혀 하지않던 그녀의 속눈썹은 왜그리 길어보였을까.




4.

 

"인간을 지배하는 최초의 이데올로기적인 권력이 국가라는 형태를 띠고 출현한다. 사회는 내외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그의 공동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구를 만들어 낸다. 이 기구가 국가권력이다……. 이것이 일정한 계급의 기구가 되고, 이 계급의 지배권을 직접 행사하게 되면 될수록 점점더 이런 독립적인 경향은 강화된다. 여기서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정치투쟁으로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이 계급의 정치적 지배에 대한 투쟁이 된다."

- F. Engels,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민중생존권 압살하는 문민정권 타도하자!"

"살인철거 자행하는 문민독재 처단하자!"

"열사의 뜻 이어받아 민중해방 앞당기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교문에서 큰길로 이어지는 길을 가득 메우고서 이리저리 제색을 휘날리던 울긋불긋한 깃발들, 한 목소리가 되어 거리를 울려대던 구호소리. 그속에 그녀도 섞여있을 터였다. 그는 아마도 본대에 머물러있는 그녀가 2학년 선배의 손을 잡고 있을지도 모르며, 녀석도 그녀와 맞잡은 손에 땀을 함께 쥐고 있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1995년 봄. 매년 5060만호의 아파트를 건설하여 임기내 주택보급률을 90%까지 올려놓겠다는 공약을 가지고 권력을 잡고서 이내 '건축제한조건 완화를 통한 건축경기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주택개발사업을 '민간'에 이양시켜버렸던 정권은 기층 민중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중대형 아파트를 만들어 팔아먹기에만 급급한 독점재벌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각 지역 '산동네'에 대한 강제철거를 그때까지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자본의 야만적인 법칙 속에서 며칠에 걸친 철거민들의 생사를 건 투쟁에도 불구하고 새벽틈에 용역깡패를 투입시켜 사람이 자고있는 집을 때려부수고 비상대책위의 시위현장을 박차고 들어가 막무가내로 연행하는 등 이땅 공권력의 작태는 가없이 악랄하고 무도해져갔다. 그러던 그 봄에 정부의 비인간적 강제철거를 규탄하며 서울 금호 1-6지구의 철거민 한 명이 몸에 불을 놓은 채 시위의 거점으로 삼고있던 높은 철탑에서 뛰어내렸고, 더군다가 그 며칠 전에는 장애의 몸을 이끌고 오토바이 노점상을 하던 사람이 정부의 사나운 노점상 단속 정책에 반발하다 끝내 분신을 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겨울이 이울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속내에서도 함께 스러져가는 듯 했던 찬바람은 이제 자연현상이 아닌 사회현상으로서 내내 그들의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이에 서울의 각 대학 총학생회와 전철연(전국 철거민연합) 등을 비롯한 각기 사회단체들이 그 첫봄의 찬바람에 맞서 들불처럼 일어섰을때, 정권의 허울좋은 도시 재개발 정책과 철거지역의 주민, 거리의 노점상에 대한 정권의 만행적인 단속과 거리 좌판 하나에 몇사람의 생사를 매단 이들 사이에 죽순처럼 돋아나던 갈등은 이미 그들 양자간의 문제일 수만은 없었다. 자본의 입맛에만 들어맞는 부르조아 관료들의 정책, 그로 인해 거리로 내몰린 철거민들, 단속과 철거를 통한 대책없는 도시미화를 이유로 이제 거리에서조차도 이리저리 쫓겨다녀야만 하는 노점상들……. 그것은 이제 비로소 남한자본주의 모순에 의해 또다시 불거지는 계급투쟁의 커다란 고리였다.

금호지구에서 분신한 철거민 열사의 추모제는 그의 학교에서 치뤄졌다. 그리고 이제 선전차원에서 대학로로 진출하려 하던 찰나였다. 예상했던 대로 학교로부터 그쪽으로 나가는 좁은 길목에 수개의 중대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가 흘러 들어왔고, 정해진 수순에 의해 재빠르게 사수대가 조직되었다. 열사의 죽음이 또 다시 여축없이 묻혀진다면 비바람이나마 막아주던 보금자리를 잃는 것도 모자라 가장마저 헛되이 잃게 되고말 열사 유가족의 눈물섞인 절규를 듣고 추모제 내내 때로는 울분을 삼키며, 또 때로는 하늘이 그날따라 참으로 무겁고 어둡게 가라앉았구나, 하는 별 개연성없는 상념에 빠지기도 했던 그였다. 그런 그는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자신이 이제야 마치 제 할 일을 찾았다는 듯 주저없이 군중의 앞쪽에 끼어들었다. 그가 사수대가 바쁘게 꾸려지고 있던 연단 좌측으로 나아가며 잠시 돌아보았을때 그녀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화장을 하지 않은 그녀의 속눈썹이 무척이나 길다고 느꼈던가. 물량이 날라지고 사수대 내에서도 빠이조(파이프조)와 꽃병조(화염병 투척조)로 나뉘어졌다. 옆에 있던 안면있는 한 2학년 후배는 그에게 선배는 3학년이니까 여기 남아있어요, 라고 말하며 자신은 빠이조로 뛰어들어갔다. 이후 교문앞 시위가 점점 가열되고 전경과 시민학생들의 전선이 밀고 밀리고 하던 와중에 그 후배가 한쪽알이 깨어진 안경을 얼굴에 대롱대롱 달고 이마 언저리에 피를 묻힌 채 두어명의 사수대 동지들에 의해 대열 후미로 비실비실 끌려가는 걸 그는 얼핏 목격했다. 전경의 방패끝에 머리가 찍힌 것이었다. 며칠 후 거즈에 반창고를 덧대어 한쪽 이마를 우스꽝스레 가린채 그 후배는 나타났었고 반창고를 떼어낸 이후에도 한참동안 그 상처자욱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다.

교내에서 대열을 구축한 후 물량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왔을 때 시위 진압병력은 예상보다 많았고 교투(교문투쟁)는 생각 외로 커질 양상이었다. 순간 열사추모대책위측에서 제지의 목소리를 높였다. 내일이 거리노제이니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자고, 학생들의 끓는 피는 이해하지만 지금 막무가내로 그렇게 밀어붙이다가는 사태가 종잡을 수 없이 커져 내일 장례식이고 뭐고 치르기 어렵게 된다고. 이에 그날 추모투쟁의 사수대장격이던 서총련 간부쯤 되는 학생 하나가 대책위쪽에 반발했고 경찰병력이 몇 미터 사이를 두고 대치해 있는 상태에서 양자간에 심한 마찰이 생겼다. 학생측 간부, 대책위측 간부 등 이쪽 저쪽에서 몇몇 사람들이 끼어들었고 그들의 언성은 갈수록 높아져 갔다. 화염병을 손에 쥔 그를 비롯한 에프비 1조 학생들은 손을 뜨겁게 달구어대는 불꽃을 든채 지도부측의 다툼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미 불을 붙인 화염병은 그것을 들고있는 양손뿐만 아니라 온몸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는데 이리되든 저리되든 민중의 삶을 점점 피폐하게 만드는 정권을 향해, 문민이라는 이름의 그 자본가정권을 향해 그는 그 불꽃을 던져주고만 싶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불꽃으로부터 점화를 시키고는 전경대쪽으로 막 뛰어가는게 보였다. 학생측 간부인 것 같았다. 한참 학생간부측과 언쟁을 벌이던 대책위측 사람은 이를 보고서 즉시 그 학생의 뒤를 쫓아 뛰어갔고 이윽고 화염병을 빼앗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리고 말았다. 자본과 그의 비호정권을 향한 그날 추모제의 최초의 불꽃, 그 불꽃은 적들의 번뜩이는 금이빨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그들의 발밑에서 초라하게 지펴지고 있었다.


"에이, 쓰발. 누구는 왕년에 화염병 안 던져봤는 줄 알어?"


대책위측 간부의 표정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고 한껏 충혈된 눈으로 이내 그가 포함된 1조를 둘러보며 쏘아대었다.


"너희들도 빨리 불꺼!"


뜨거움.

갑자기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언뜻 화염병을 들고 뛰쳐나가던 학생과 성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던 그 남자의 속눈썹이 참으로 길어보인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그는 했다. 살인적인 정권과 그에 의해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 사람들…… 그것의 기폭작용에 의해 모인 또다른 사람들, 그리고 '왕년에 화염병 꽤나 던져보았을' 그 사람들……. 시위대열과 진압병력 사이의 짧은 거리는 어느새 휑뎅그렁한 벌판으로 화하고 한없이 숭고하게 기려져야 할 열사의 원혼은 벌써 그 벌판 저멀리 날아가고 있는 듯 했다. 그 순간 함께 1조에 소속된 학생들이 각자의 불꽃을 들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몇 걸음 뒤에 2조 학생들도 그들을 따랐다. 그 뒤를 잇던 또 다른 학생들, 그리고는 이내 뒤따르던 혼돈과 아우성…… 그들을 보며 불끄라고 호령했던 그 속눈썹 길어보이던 남자도, 학생측 간부도, 그들이 내지르던 악다구니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건 그냥 두세 걸음 앞에 있던 어느 전경의 헬멧과 그 너머에 아련하게 보이는 듯 하던 어두운 눈빛, 방패, 그리고 온몸을 달구던 뜨거운 기운. 혼란 속에서 그는 자꾸만 몽롱함 속으로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펑펑펑.


귀를 울리는 최루탄 폭발음과 방패와 방패 사이를 비집고 뛰어나오던 청백색 헬멧들의 기세에 그가 예의 몽롱함으로부터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고 온몸을 달구던 기운도 어디론지 자취를 감춘 후였으며 그는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리속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던 생각. 속눈썹이 길게 보이던 사람들이었다.


속눈썹이 긴 사람들.

그 이후로 그의 활동이란 것은 기껏해야 후배들 몇 데리고 유물론 서적을 학습하는 것에서 별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속눈썹이 유난히 길던 그녀는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인 그의 곁을 떠났다. 이후에 그가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장고를 두드리고 있었고 여전히…… 화장기 없는 얼굴의 그녀는 속눈썹이 길었다.



그렇게 봄은, 세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화창했던 그의 봄은 그녀의 긴 속눈썹과 함께 스러져갔고, 그 해 여름의 느즈막까지 계획된 학습을 후배들과 마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세금고지서처럼 헐렁히 생겨먹은 군입대영장이었다. 입대하기 전, 이젠 어느 정도 자신의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던 후배들의 활기찬 모습들에 비해 그는 갈수록 무기력해져만 가는 스스로와 날짜가 다가올수록 자신도 모르게 잊혀진 줄 알았던 그녀의 긴 속눈썹을 애타게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눌러둔 채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던 그. 그렇지만 끝내 그녀는 그의 앞에 나타나주지 않았고 입대와 함께 그녀의 길던 속눈썹은 어느덧 잊혀져 갔다.

 


5.

 

"헤겔은 어느 부분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 K. Marx,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고대로부터…) 이미 시작된, 계급으로의 사회분열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착취할 권리와 후자에 대한 전자의 지배를 영구화시킬 그런 제도가 … 나타났다. 즉,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 F. Engels,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그가 전역을 한달여 남겨둔 병장 말년이었을 즈음이었다. 국가는 그 태생적 배경 자체가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런 계급지배를 보다 공고하게 제도화, 영속화시키기 위해 조직, 발전한다는 이론과 사상적 경향을 학습한 그에게 국가기구로서의 군대는, 그가 입고있던 얼룩무늬는 분명 그 조직의 구성원이 공인된 '깡패'에 다름아니라는 증거에 불과했다. 빈민촌을 강제철거하는데 이용되던 용역깡패와 비슷한……. 그래서 언젠가 다시한번 '80년의 광주의 봄과 같은 상황이 희극과도 같이 재현된다면 사회의 권력구조상 '당연히' 민중을 짓밟아버릴 수도 있는 그런 위치의…….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자신을 무장하면 할수록,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화된 세상에서 그 계급간의 투쟁이 사회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을때 투철한 '군인정신'이라는 허구적 관념으로 표현되고 있는 거대한 조직적 실체는 결국 어느 진영에 서게 될 것인가를 가정해 본다면 그의 생각은 너무도 자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군생활에 도통 적응을 할 수가 없었고 몇 번 되지도 않은 휴가를 나가서도 선배들, 그리고 후배들 앞에 결코 떳떳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처럼 그런 그 또한 그 만큼의 시간을 지불한 끝에 전역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일과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점심을 먹자마자 중대원 전체가 집합하여 부대내 주도로 배수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낙엽은 왜이리 쌓이는지 치우고 치워도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 군대에서만 해도 벌써 세번째 가을이었건만 그런 그도 한없이 쓸어내야 하는 낙엽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던 그 가을 어느날. 그는 소위 말하는 말년이었음에도 눈을 부라리는 중대 행정보급관 앞에서는 마음놓고 삐댈 수도 없었다.


"오OO 병장님!"


중대 행정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병 녀석 하나가 이름을 부르며 주도로로 올라서고 있었다. 원체 장난기가 얼굴전체로 퍼져있는 녀석이었지만 그날따라 유달리 배실배실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면회 왔습니다."

"무슨 면회?"

"여자던데 말입니다."

"여자……?"


대학 삼년, 아니 정확히 말해 이년 반이 넘는 동안 후배나 동기, 선배 말고는 변변한 여자친구 하나 없던 그에게 어머니나 누나가 아닌 '여자'가 면회를 왔다는 사실은 그에게 적지않이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름이 뭐였는데?"


면회준비를 하기 위해 일병녀석과 함께 중대로 내려오며 그가 물었고 갑자기 돌로 얻어맞은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상기되는  하나…… 속눈썹이었다.



6.

 

"아직도…… 장고 치니?"


약간 떨었었나.

그의 입을 통해 새어나오는 소리는 그가 듣기에도 어색하리만치 이상했다. 한때는 자신과 한 울타리 안에 있던 후배가 고맙게도 면회를 와주었고 그에 대해 반색은 못할 망정 아직도 예의 그 미묘함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의 태도에 그는 지레 마뜩치 못해 하고 있었다. 그녀, 대답없이 담배연기만 낮은 술집 천장에 뱉어내고 있었다. 대답을 꼭 들어야 한다는 생각 따윈 애초부터 그에게 없었다. 그냥 아무 얘기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 뿐. 참을 수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흐르던 침묵. 그는 자신과 그녀 사이를 흐르던 그 깊고 툽툽한 공간을 바라보며 몇 잔인가의 소주를 연거푸 들이부었고 그럴 때마다 선술집의 희미한 조명은 더욱더 흐릿해져만 가는 걸 느꼈다.


약 이년전, 그녀가 그가 주도하는 학습써클을 떠났을 때, 그는 적잖이 아쉬워했었다. 물론 내성적인 그의 성격상 결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만 원래부터 속눈썹이 유난히 긴 그녀도 그의 곁을 떠나는구나, 하는 실망감과 또 원래부터 속눈썹이 긴 그녀가 이후에 그에게 보여질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진하게 남았던 걸로 그는 기억한다. 하지만 몇 번의 학습과정을 통해 그가 간파해낸 그녀의 성향, 즉 반제국주의를 넘어선 극렬 반미주의, 이상적이리만치의 통일지상주의적 성향에 의한 당연한 이끌림이었던지 아무튼 그녀는 중앙 풍물패에 들어갔고 몇 개월 후 장고를 메고선 시위대열 앞에 서곤 하는 그녀의 모습을 그는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짧게나마 씁쓸한 감정을 되씹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녀는 여전히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여전히 속눈썹이 길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그녀가 면회왔던 날, 그는 운이 좋았던지 사람착한 당직사관을 만나 쉬이 외박을 나올 수 있었고 외박을 나오자 마자 그녀와의 별다른 의견조정도 없이 함바집 같은 초라한 선술집으로 들어갔었다. 그래, 싫다는 그녀를, 한사코 자취방으로 올라가겠노라고 하던 그녀를 그는 몇 번인가 붙잡았던 기억이 오랜 사진첩에서 잊었던 사진이 함초롬하게 발견되듯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학교앞 소줏집으로 사람들과 몰려 들어가며 후배들에게 절대로 집에 먼저 가면 안된다고 못을 박던 자신의 모습, 밤이 늦도록 그들과 이야길 하고 때론 논쟁도 마다하지 않던 날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그녀도 그 긴 속눈썹을 하고 마지못해 앉아있곤 했다. 못마시겠다던 소주를 한번 마셔보라고 권해보았지만 그녀는 입만 대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잔을 놓았더랬다. 그리고는 이내 되찾던 예의 그 무표정……. 그랬던 그녀가 그를 비롯한 가깝던 선배들과 동기들 곁을 떠난 후, 시위때 장고를 치는 모습 말고도 그가 흔히 볼 수 있었던 또 다른 모습은 학교앞 소줏집에서 풍물을 하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앉아 술을 마시는 거였다. 그때마다 부러 의식하려 하진 않았지만 그는 많이도 변해버린, 그것도 자신의 곁을 떠나자마자 그렇게도 변해버린 그녀에게 약간의 섭섭함 같은 걸 느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가 면회온 그 가을날 무작정 소줏집으로 찾아들어갔던 건 그날의 그 풋내나는 섭섭함 따위에 대한 치기어린 자기보상심리 같은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나 그 이른 오후에서부터 그녀와 그가 버텨내야만 했던 기나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오랫만에 마시는 술이라 그랬는지 그는 금세 취해가고 있는 자신을 감지했고 실제로 금방 취해갔다. 그 순간 이후로 조각조각 기억나는 일들. 별 이야기 없이 내도록 술만 퍼마시다가 탁자위에 엎어져버린 것 같고 또 한참을 어둠속을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골목 담벼락이 눈에 확 들어왔었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였고 그녀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었다. 그러면서 그는 줄곧 뱉어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새김질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그 때문에 자신 안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들어앉아 가끔씩 자신을 답답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은 항상 그대로인데, 그대로이고 싶은데 자신이 속해있던 이전의 많은 것이 너무도 변했고 또 변해간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그는 그의 뒤에서 등을 두드리기도 하고 쓸어주기도 하던 그녀는 왠지 이전의 그 표정, 그 눈빛, 그 속눈썹 그대로일 것이라는 생각을 여러번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또 다시 어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풍경들. 아니 파편적으로 머릿속에 유리조각처럼 들어와 깊게 박히던 그날밤의 기억……. 다시 그 어둠속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삼류여관의 입간판을 보았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다. 방값은, 그리고 아까 마셨던 술값은 어떻게 계산했는지 그 또한 기억나질 않지만 허름한 여관으로 들어간 그와 그녀가 했던, 아니, 그녀의 입을 나와 일방적으로 그의 귓속에 들어앉던 낮은 독백같은 이야기만큼은 왜 그리도 그의 기억속에 명징하게 남아 의식속에 공명을 울리고 있는지.

방안은 캄캄했고 한참을 부시럭거리는 듯하던 그녀는 술이 취해 방바닥에 널브러져있던 그의 머리를 가슴에 꼭 품었다. 짧고도 까칠하던 그의 머리, 놀랍게도 그 머리를 통해 느껴지던 촉감은 맨살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알몸을 처음으로 안으면서 내지르던 탄성, 여자는 왜이리 부드럽고 따뜻할까, 하는 탄성을 하마터면 그도 내지를 뻔 했다.


"나…… 형 너무 좋아했던 거 형 모르죠?"

"……."

"형이 너무너무 좋았어요, 미치도록. 그래서…… 그래서 형 곁을 떠난 건지도 몰라요. 나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적어도 내가 보고 싶었던 세상은, 아니…… 그게 너무 거창한 거였다면……, 최소한 보고 싶던 나의 모습은 남자의 팔에나 매달리는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형이 술에 억병으로 취해서 자취방에 올라가려는 내앞을 가로막고서 했던 말 기억나요? 넌 속눈썹이 길어서, 그래서 좋다고……. 속눈썹이 원래 기니깐 다른 여자들처럼 세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동시에 그래야 하는 자신을 채근하기 위해 속눈썹을 인위적으로 붙일 필요가 없을 거라고……. 그래서 좋다고. 형 입대하기 며칠전이었을 거예요. 자취방 올라가는 길목에서 나를 기다렸던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기서 마주친 형은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고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어요……."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입대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속으로는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도. 그녀의 입에서 중얼거리듯이 새어나오는 말을 들으면서 그의 정신은 어느덧 언제 그랬냐 싶게도 맑게 열리기 시작했다.


"장고 치냐고요? 아니, 그거 그만둔 지 오래예요. 난……, 형이 너무 좋아서 형을 떠났는데…… 쉽게 떨쳐버려지질 않더군요. 그때 나, 아무 생각 하고싶지 않았나 봐요. 형에게서 멀어지자 마자 곧바로 채를 잡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북이든 장고든 마구 두드려댔죠."


신이 들린 듯 장고를 치던 그녀. 그런 그녀를 만난 이후 시위대열 속에서 그는 몇 번인가 그녀의 그런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변함없이 길기만 한 그녀의 속눈썹은 그가 그러는 동안 그의 의식 바깥에 존재하지 않았다.


"근데…… 형을 떠나 들어간 그곳에서 나…… 다른 사람을 만났어요……. 우리 풍물패 선배였거든. 91학번이었으니까. 4학년쯤 되었었나. 몰라, 기억 안나요……. 그 형도 날보고 그러대요……. 넌 속눈썹이 길고 예뻐서 좋다고……. 보면 볼수록 예쁘다고. 그리고 나……, 그 형한테서 우습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느꼈던 것 같아요……. 웃기지 않아요? 사랑이라니……."


여전히 그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서 그녀의 지난 생활사를 듣고만 있었다. 마치 미리 준비해온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거침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술이 엉망으로 취한 상태로 듣고있던 와중에도 혀꼬부라진 그녀의 말소리에 그녀도 많이 취했나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니까 장고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더라는 얘기였다. 쓸데없는 생각 안 하고 그를 따라서 처음 거리로 나섰던 그 마음 그대로 살고 싶었는데 그런 자신의 다짐을 되새겨보려고 했을때 이미 그녀의 몸과 마음은 그 선배에게로 가 있더라고 했다. 속눈썹이 유난히 긴 그녀를 예쁘다고, 보면 볼수록 예쁘다고 했던 그 선배에게로. 그러던 그 이듬해 그녀의 선배는 졸업을 했고 자신의 아버지가 이사자리에 앉아있던 어느 유망 대기업에 취직을 했으며 그와 동시에 이미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린 그녀를 버렸다고 했다.


"아니, 버렸다는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닐거예요. 솔직히……, 그 형은 나한테 속눈썹이 길어서 예쁘다는 말만 했었지 사랑하네 뭐 어쩌네 하는 따위의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냥……, 그냥 모임약속을 어기고 그 형과 함께 영화를 보거나 차를 함께 마시면서 혼자, 나 혼자만 가슴 속에 새긴 말에 지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사랑……."


갑자기 자지러질 듯 쏟아내던 그녀의 웃음이 칠흙같던 그 밤의 어둠을 뚫고 그의 고막에 아련하게 남는다고 느끼던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간밤에 실체모를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뒤쫓아가는 꿈속에서 한참 허우적거린 것 같았고 다음날 아침, 깨어질 듯 쑤시는 두통과 함께 홀로 깨어난 자신을 발견했다. 밤새 무엇을 그리 쫓았던 것이었는지.

 


7.

 

갑자기 버스가 멈추었는지 의자에 묻혀있던 그의 몸이 심하게 앞으로 쏠린다. 잠이 들었었나. 창밖을 보니 포천을 지나고 있는 길에 앞서가던 차량이 사고를 냈는가 보다. 그가 타고있는 붉은색 철원행 직통버스를 비롯해서 앞뒤의 차들이 정지해 있고 주위가 어수선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다섯시가 채 안된 시간. 복귀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다. 내일 모레가 전역인데 무슨 큰일이라도 있을까, 하는 안심을 그는 해보기도 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말년휴가를 받아 나갔을 때 그는 맨먼저 학교길을 올랐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올라보는 학교길. 언젠가 학우들의 한걸음 한걸음이, 그리고 그들의 구호소리가 물결을 이루던 그 길, 그 물결에서 그는 나 혼자가 아닌, 또는 너 개개인이 아닌 '우리'를 확인했고 거의 대부분의 측면에서 야만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대항하는 강한 하나로서의 '우리'를 확신할 수 있었던 그 길. 이미 반세기 전에 ''우리'는 없다'라며 한길을 향한 공동체적 개념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사르트르의 주장을 읽고 그래서 넌 결국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거야, 라고 혼자 조소하기도 했던, 그래서 종국에는 옆에 있던 학우 하나하나를, 그리고 나아가서 그들이 변혁의 주체로서 믿어의심치 않던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 모두를 '우리'로 규정할 수 있었던 그 길, 그 길에서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한줌도 안되는 자본가들의 질서를 뒤집어야 한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갖게 했던…… 그 길. 그는 그 길을 다시 되짚어 오르고 있었다.

그가 그 길을 마지막으로 올랐던 게 언제였었나 싶게 많은 시간이 지나기도 했건만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그 길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순간의 그는 그 언젠가처럼 '우리'라는 공동체를 그리며 걷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다시 한번, 이제 새롭게 그녀의 속눈썹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그를 그 곳으로 이끌었으니까. 교내로 들어간 그는 당장에 불문과 학생회실로 갔었다. 몇몇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무슨 프린트물을 돌리고 있었고 군복을 입어 왠지 머쓱한 그로서는 그들에게 다가가는 데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었다.

그녀를 잘 모른다는 1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말을 듣고서는 곧장 중앙 풍물패방을 찾았었다. 뒷머리를 꼭 쟁여묶은 여자의 뒷모습. 그녀였다. 그는 대뜸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깜짝 놀란 듯 하며 돌아보던 여자도 속눈썹이 길었지만 진한 화장품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한달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전공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는지 뭐였는지 아무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3학년때부터 풍물패 일은 하지도 않고 도서관에서만 살다가 휴학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더니 유학을 갔더라는 머리묶은 그 여자의 친절한 설명을 성실하게 다 듣고, 그로 하여금 일시적인 착각을 야기했던 그 여자의 머리묶은 뒷모습을 또 한번 보고나서야 그는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 영문과 학생회실을 잠깐 들러볼까 망설이던 그는 이내 단념을 해버렸고, 다시금 예의 그 길을 내려오면서 그녀가 화장을 하기 시작했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다.



다시 버스가 출발하는지 몸이 뒤로 약간 뉘어진다. 시간이 얼마쯤 소요되었는지 알고싶긴 하지만 그는 애써 눈을 감은채 그대로다. 그리고는 또다시 의문의 골을 파기 시작하는 스스로를 본다. 그녀, 이젠 제법 화장이나 하고 다닐런지, 아니면 예전 언젠가의 그 긴 속눈썹 그대로일지.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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