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주'의 '기사(the Knight)'
'백일주'의 '기사(the Knight)'
- [N.E.X.T] 1집, <인형의 기사>, 1992.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웃던 그녀의 어린 모습을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
너 떠나가는 자동차 뒤에는 어릴 적 그 '인형'이 놓여 있었지.
난 하지만 이제는 너의 '기사'가 될 수 없어."
- [N.E.X.T] 1집, <인형의 기사 - part 2>, 1992.
누구에게나 오래된 사진 같은데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장면들이 있을 게다. [무한궤도] 리드싱어로 데뷔한 신해철이 독립 후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N.E.X.T]가 1집을 냈던 1992년에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타이틀곡은 <인형의 기사>였는데, 오래전부터 짝사랑하던 여자사람친구가 시집갈 때까지 찌질하게 고백도 못하고 평생 '인형'을 끌어안고 사는 '기사(The Knight)'가 되겠다나 뭐라나 읊던 매우 슬픈 노래였다.
다 듣고 나면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정체불명의 '인형'의 잔상이 남았고, 특히 내게 남은 이미지는 국적불명의 구체관절 인형이었는데, 이 이야기의 주제는 '인형'이나 '연애' 이야기는 아니고 환상 속 '햇살'과 같은 내 기억의 이야기다.
나는 양력 9월 12일에 태어났고, 고3이던 1992년의 그날은 추석 연휴였다. 우리집은 진실로 가난했지만 어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 기죽지 말라고 생일날이면 많은 친구들 모아 짜장면이라도 사주라며 만원 짜리 몇 장을 꼭 주셨다. 당시 어머니가 부업으로 밤을 새던 나무젓가락 100개 한 다발을 포장하면 50원인가 받던 시절이었다.
나는 대입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였는데, 학교에서는 이육사 시인의 <절정>이라는 처절한 시를 인용하며, 너희들은 절벽에 섰고 다음은 없다,고 강조했다. '서릿발 칼날진' 절벽에 선 우리들은 그래도 '백일주'는 마셔야 했는데, 12월 학력고사 100일 전이 마침 추석 연휴였고 딱 내 생일이었던 것 같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경희고 31회 졸업 예정 '철봉파' 우리 친구들은 산동네 옥탑방의 주영이네 집이 비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는 아니었지만 꽤 많은 친구들이 그 빈 집에서 '백일주'를 마셨다. 각자 국민학교와 중학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모인 우리 '철봉파'는 원체 구성도 다양하여 문과와 이과반, 재수생과 현역을 넘나드는 인적 네트워크를 자랑했고, 중학교 때부터 술담배, 심지어는 검정 비닐봉투 본드까지 섭렵한 친구부터 백일주 당시까지도 술 한방울 안 마시거나 '밀밭에만 가도 취하는' 친구들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적 제사 때부터 음복술을 원샷 때렸고 집에서 '스뎅' 대접에 어머니가 몰래 따라드시던 진로소주를 훔쳐먹어도 봤으며 고3 여름방학 때 단기로 끊은 '운주독서실' 옥상에서 '노는 애들'한테 종이컵으로 소주를 연거푸 받아마신 경험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해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학력고사 '백일주' 그날은 내 19년차 생일이었다는 거다.
난 당연히 어머니가 주신 만원짜리 몇 장 들고 친구들과 주영이네 옥탑방으로 향했다.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은 소수였고, 당시까지 나는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주의자였다. 그래도 빈집이었으니 가장 조숙했고 친구들에게 술담배와 당구 등 여자만 빼고 '노는 기술' 대부분을 전수해준 경모를 위시한 몇 명은 좁은 방구석을 너구리굴로 만들었는데, 백주대낮부터 들이마신 술기운에 뿌연 담배연기 사이로 연신 들려오던 음악이 바로 신해철의 [N.E.X.T] 1집이었다. 빠른 템포의 <도시인>이 나오면 다들 따라부르며 분위기가 업되었는데, 그날 낮부터 다음날 집에 갈 때까지 오로지 <인형의 기사 - part 2>만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거나하게 취한 그날부터 그 '인형'은 정체불명의 구체관절 인형이었고.
열아홉 열혈 청소년들 십여 명이 처음으로 취하면 아마도 그 무엇도 이길 수 없으리라. 우리 '철봉파' 백일주 전사들은 누군가의 선동에 따라 스크럼을 짜고는 이문3동 산동네 옥탑방에서부터 이문2동 동사무소 앞에 위치한 우리의 자랑찬 모교인 경희고등학교 철봉대까지 음주시위를 거행했다. 2년 반 전 우리 자랑찬 '철봉파'를 배태한 '성지'인 학교 철봉대를 도저히 찾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소심한 우리들은 아마도 길거리에서는 술이라고는 냄새도 못 맡아본 것처럼 조신하게 행진했겠으나, 우리의 '성지' 철봉대에 이르러서는 끓어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을 거다. 우리는 음주철봉과 취중평행봉을 하고 감히 학교 운동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신해철과 김종서의 노래 등으로 고성방가를 이어갔다. 나야 술이 취해 과감했으나 술을 안 마신 친구들이 그 시위에 동참한 생각을 톺아보니, 술 안취한 그 새끼들은 지금 봐도 진정한 '용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모교에서의 그 '반란'은 성공할 수 없었는데, 우리 학교와 붙어 있던 경희대학교 규찰대 엉아들의 느닷없는 후레쉬 불빛과 주로 검도 동아리로 구성되었던지 그 엉아들의 검도 죽도로 인해 무참하게 진압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술을 마셔 혈기가 더 왕성해진 효종이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은 대학생 규찰대 엉아들이나 우리나 나이차가 얼마나 난다고 엎드려 뻗쳐서 처맞고 있냐며 눈물을 삼켰지만, 사실 소심하라면 그 중 둘째 가기도 서러운 나는 갑자기 술이 확 깨어 학교 당국에 걸리지 않았음에 깊이 감사하며 그냥 '생일빵' 거하게 한 번 맞았다 생각하기로 했고, 규찰대 엉아들에게 다시는 안 그럴 것이고 때리는 대로 다 맞을 것이며 학교에는 이르지 말아달라 '타협안'을 제시하는 이른바 '화친파'였다.
다행히 술취한 효종이와 경모를 비롯한 '강경파' 덕분에 우리는 규찰대를 적당히 얼러서 학교에까지 '시위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았던 것 같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학교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 소식도 없었던 거다.
다음날 역시 [N.E.X.T]의 노래들을 들으며 일어난 우리들은 전날의 과감했고 용감했으며 무모하기 짝이 없던 무용담을 나눴고, 역시 조숙한 경모와 효종이 등 '강경파'는 아침 해장술까지 때리며 규찰대 엉아들에게 당한 굴욕을 곱씹고 있었던 것 같다.
'화친파'였던 나는 국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나는 '평화'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저 소심했고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서 '화친파'가 된 것이었기에 괜히 부끄러웠다. 그런데 사십대 후반인 지금 돌아보면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 또 다시 부끄럽다.
규찰대 엉아들에게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던 약속은 지켰다. 학력고사 백일주를 마실 일이 다시는 없었기 때문인데, 어쨌든 신해철 형님의 [N.E.X.T]가 가끔 떠오를 때면 1992년 추석 연휴 보름달 아래서 우리 '철봉파'가 치렀던 혈기왕성한 '백일주 시위'가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나이든 중년의 우리는 혈기왕성하고 무적방자하던 그 '인형'을 지키는 '기사'가 다시 될 수 있을까.
그 기억을 안고 나는 지금,
이제는 늙어가는 그 당시 '강경파' 하나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
- [N.E.X.T] 1집, 신해철,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