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회 기념 서문] 내 '꿈'의 대가는 대량의 '즐거움'
[서문] 내 '꿈'의 대가는 대량의 '즐거움'
-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팩토리나인>, 2020.
"시간의 신은 그림자와 기억이 담긴 병을 셋째(잠든 시간)에게 건네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들의 그림자가 대신 깨어 있도록 해주어라.'
...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도 생각하고 느끼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림자가 밤새 대신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은 둘째(과거)처럼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첫째(미래)처럼 경솔한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
'이름이라도 붙여주십시오. 기적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허상입니까?'
...
''꿈'이라고 부르거라. 그들은 이제 너로 하여금 매일 밤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마침내 시간의 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 [달러구트 꿈 백화점], <프롤로그 - 세번째 제자의 유서깊은 가게> 중 '시간의 신과 세 제자 이야기', 이미예, 2020.
이야기는 '페니'라는 청년 구직자의 면접 전날부터 시작한다. '꿈'의 나라 주요 '상품'인 '꿈'을 파는 '달러구트 백화점' 면접준비를 하던 그녀에게 친구 '아쌈'이 건네준 <시간의 신과 세 제자 이야기>를 읽은 페니는 다음날 백화점 사장인 '달러구트'의 면접을 통과하고 취업에 성공한다. '꿈'이라는 '상품'에 관한 모범답안보다 '꿈'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잠을 충분히 잔 사람에게 더 팔려고 하지 않는 '달러구트'의 영업방침에 부합한 답변으로 면접에 통과한 것이다. 작가 이미예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꿈 백화점' 달러구트 사장과 판매원으로 취직한 페니, '꿈' 제작자들과 잠든 후 '꿈'을 찾아오는 손님들, 그리고 '꿈'의 나라와 별개로 존재하는 잠들지 않은 사람들의 현실을 중층적으로 보여준다. 판매 매니저 '마이어스'가 꿈' 제작자가 될 자격을 잃고 학교에서도 짤린 이유가 잠들지도 않고 '꿈'의 나라를 오가는 '루시드 드러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보면, 현세와 '꿈'의 나라는 교류해서는 안되는 세상인가 보다. 잠들지 않은 존재를 만나는 자는 '꿈'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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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정신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보험금 심사하고 청구인과 합의하고 지급해서 치워버리는 일인데, 극도로 재미가 없는 일이지만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 무조건 하루에 다섯건 이상은 처리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종류 불문, 이유 불문, 다섯건. 손해사정이고 뭐고 필요없다. 보험사고라는 '문제'가 발생했고 이 회사에서 20년 넘게 월급을 받은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다섯건을 해결하고 퇴근하면서 다 잊는다. 왕복 세시간의 출퇴근을 차보다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는 이유는 책을 읽기 위해서다. 그래야 매주 한 편 이상 서평을 쓰는 '주간(週刊) 문사철(文史哲:문학-역사-철학)'이 가능하다. 아직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에 앞마당을 쓸고, 칸트가 죽기 전날까지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산책했다는 풍문을 오래 전 역시 책에서 읽고는 나 또한 나름 실천하는 중이다. 원래 이십대 때 '꿈'은 '소설' 쓰기였지만, 내 글을 관심있게 읽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삼십대 이후로 그 동안 읽은 책이나마 혼자 기억하고자 '서평'을 써 왔다. 독자는 나 하나 뿐인 글이다. 그러다가 사십대 중반을 지나면서 인생이란 게 영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새삼 체득하고는 그나마 남긴 내 흔적인 '서평'을 이제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라며 매주 한 편 이상씩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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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나라에서 '달러구트'가 파는 '꿈'은 그 세상의 주요 '상품'이다. 오래전 '시간의 신'의 세 제자 중 첫째는 '미래'를, 둘째는 '과거'를 물려받았으나 셋째는 '현재'도 아닌 '잠들거나 잠든 시간'을 물려받는데, '미래'의 진취성과 '과거'의 유약함을 섞어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그들의 그림자로 하여금 그 혼합된 삶을 살게 함으로써 그들 존재 스스로 무언가를 깨닫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라진 '시간의 신'이 붙여준 셋째 제자의 '시간'이 바로 '꿈'이었으며, '달러구트'는 그 셋째 제자의 후손이다. 그는 이 '꿈'이라는 상품의 값을 '후불'로 받는다. 그리고 '꿈'이 필요하지 않은 손님에게는 팔지 않고 그냥 가서 푹 자라고 '수면캔디'를 준다. 또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예약제 꿈을 의뢰받아 정한 시간에 살아남은 고인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배달까지 한다. '꿈' 제작자도 여럿 나오지만 어차피 그들의 이름은 '달러구트'처럼 큰 의미 없는 고유명사이거나 설령 뜻이 있다 해도 굳이 몰라도 이야기 전개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꿈'의 나라의 주된 '상품'인 '꿈'이 아무래도 '글'로만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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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의 1/3을 잠으로 보낸다. 이 잠든 시간을 애정한다는 작가 이미예는 클라우드 펀딩으로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라는 이야기를 에피소드로 연재했고 후원자들로부터 많은 성원을 받아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라는 장편소설을 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는 기발하다. 어느새 반백년 가까이 살게 된 나는 뭐, 이제 그런 이야기를 쓸 수도 없고, 쓰고 싶지도 않다. '서평' 대신 책을 '읽어주는' 유투브 영상도 차고 넘치는데 그 레드오션에 한데 섞일 깜냥도 안된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마당을 쓸거나 산책을 하듯 꾸준히 책을 읽고 '서평'을 빙자한 '독후감'을 쓸 뿐이다. 그 과정 자체가 내게는 한바탕 '놀이'다. 하루에 다섯건을 처리하러 갔다가 오는 길은 책이 있어 지루하지 않고 매주 금요일은 주말에 무슨 글을 쓸까 하는 생각으로 업무를 즐겁게 마무리할 때도 가끔 있다. '업무 시간이 즐겁다'니 놀라울 일이지만, 꾸준히 '글'을 쓰겠다 생각한 이후로 믿기지 않게도 사실이다.
'꿈'이라는 저 세상 '상품' 중 내가 무엇을 구입했는지는 잠이 깬 지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후불'로 내가 입금한 그 '꿈'의 값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 1층 프런트의 '드림 페이 시스템즈(Dream-Pay Systems) 전광판에 다음과 같이 표시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띵동.
OO꿈의 대가로 '즐거움'이 대량 입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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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이미예, <팩토리나인>,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