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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Jul 18. 2021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1790) - 정조

조선 '개혁'을 위한 '최후의 무예서'

조선 '개혁'을 위한 '최후의 무예서'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정조(正祖) 편찬,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저술, <규장각/장용영>, 1790.





"무예제보(武藝諸譜)에 수록된 곤방,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등 '6기'는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나왔다. 선조(宣祖) 임금께서 재위시절 (훈련도감) 훈국랑 한교가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 편찬하여 간행한 것이다. 선왕(영조) 기사년(1749년)부터 아버지 사도세자께서 업무를 대신 수행하셨는데 기묘년(1758년)에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 등 '12기'를 증입하도록 명하였고, 그림(圖)과 해설(譜)을 모두 모아 정리하여 [무예신보(武藝新譜)]를 만들었는데... 내가 즉위한 원년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앞의 '18기'를 함께 무예시험 과목으로 연습하도록 처음으로 명하였고, 또한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등 '4기'를 더 추가하였다. 지금 또 격구와 마상재를 그 아래에 덧붙였다.

...

이에 무예의 신/구보 '24목'을 너희들에게 모두 주어 상세히 연구케 하여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이름을 내려주노라."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병기총서>, 정조, 1790.



어린 시절, 태권도 '품증'은 배불뚝이 아저씨 한 분이 택견 품세를 하는 그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림그리기 좋아했던 내게는 품증의 내용보다는 그 바탕화면이 항상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선 후기 학자 이만영의 [재물보](1789)라는 책에는 '권법'을 이르는 '변(卞)'과 '각력(角力)'에 관한 해설이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전승된 우리식 씨름인 '수박(手搏)'을 '변'이라 하고 겨루기를 뜻하는 '각력'은 '무(武)'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를 '탁견'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중국 [한서] <애제기>편에 적힌 "변사와 무희를 관람하셨다"는 최초 기록에서 힘을 겨루는 '변'과 '각력'은 고대로부터 '무예놀이(무희:武戲)'라는 주석이 나왔다는데, 황해도에 있는 우리의 고구려 안악 3호분묘 벽화에도 맨손무예인 '수박'의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이런 격투기 대련은 관람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에서도 '레슬링'이 고전종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이 맨손무예를 '탁견'이라 불렀단다. 우리 태권도의 원형으로서 '택견'의 어원에 관한 기록이다. 전통 무예로서 그 역사와 정신을 추적하는 태권도협회의 노력은 우리 권법의 사료적 기원을 우리식 무예서에서 찾을 것인데, 우리식 '권법' 총화의 원형은 사도세자의 [무예신보]에 전하는 '18기(十八技)'에서 찾는다.



우리 한반도와 요동인들은 오래전부터 활과 화살을 강조했고 수련해 왔다. 고대 원거리 전투의 효자종목인 활쏘기는 우리 전쟁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고 우리 역사에서 대부분의 영웅들은 명궁이었다. 조선 무과에서도 아마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등장한 조총은 신병기로서 그 위력은 놀라웠겠으나 사정거리나 장전능력에서 아직 활보다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장도를 앞세운 왜군의 단병접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조선군은 왜란 후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포수(조총)', '사수(활)', '살수(창칼)' 등의 부대 편제와 훈련을 강화한다. 선조는 훈련도감 장수 한교에게 명해 명나라 파병군의 장수를 만나 여섯 가지 무예를 전수받아 조선 최초의 국정 무예서를 만들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무예제보](1598)다. 곤방(봉), 등패(방패), 낭선(독묻힌 대나무 가지), 장창(긴 창), 당파(삼지창), 쌍수도(양손으로 잡는 긴 칼) 등 '6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확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이다. 이것이 광해군 대에 [무예제보번역속집](1610)이라는 제목으로 '권법', '청룡언월도', '협도곤', '왜검' 등 '4기'를 추가하였으나 패주인 광해군의 업적은 높이 기릴 수 없었다. 영조 시절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는 병자호란을 겪고 청에서 인질생활을 하다가 즉위 후 '북벌'을 외치던 효종이 말을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던 기상을 본받아 무예를 중시했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북방의 기병술과 남방의 보병술을 두루 훈련하기 위해 기존 '10기'에 죽장창(긴 대나무창), 기창(깃발창), 예도(일반검), 교전(검겨루기), 쌍검(쌍칼), 제독검(장수검), 본국검(조선검), 편곤(도리깨/쌍절곤) 등 '8기'를 보태어 조선무예 '18기'를 완성한다.

결국 조선 후기 '르네상스 개혁군주' 정조에 이르러 기창(말을 탄 창술),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격구(마상 스포츠), 마상재(마상 서커스) 등 '6기'를 덧붙여 조선무예 '24기'로 증편되었다.



정조는 즉위 연설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 일갈했다는데, 이는 노론에 대한 정치보복을 예고하는 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의 형인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 형식으로 '적통'이 만들어져 즉위한 정조는 본인을 앞세워 사도세자를 극히 높여 당쟁을 격화하는 술수를 부리지 말라는 경고를 통해 당시 집권당 노론을 경계했다. 영조의 '탕평책'을 잇겠다는 천명이었으되 한편으로 조선 개혁의 동력을 지배세력에서 찾지 않고 서얼 출신의 천재들을 직접 기용하여 '개혁군주'의 친위대로 삼았다. 정조 개혁의 핵심 조직은 '문치개혁'의 '규장각'과 '무치개혁'의 '장용영'이었다.





"정조 시대의 국정 운영의 방향은 '문치규장 무설장용(文治奎章 武設壯勇)'이라는 문장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문'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초계문신제를 도입하고 성리학을 바로 잡으며, '무'는 친위 군영인 '장용영'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군영 장악은 국정 장악에 반드시 필요했기에 가장 중요한 개혁의 대상이었다. 정조의 '무(武)'에 대한 특별한 인식은 장용영 설치와 함께 다양한 병서의 편찬으로 구체화되었다."

- [정조, 무예와 통하다], <[고이표]와 '통지'의 의미>, 최형국, <민속원>, 2021.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꾼 '개혁군주' 정조는 '왕권 강화'를 통해 조선의 변화를 기획했다. 18세기 당시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의 목이 날아가던 '시민권 강화'의 시대였지만, 아시아에서는 다수의 복지 증진을 위한 '공공성'이 '시민권'이 아니라 '왕권'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19세기에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해 서양에게 굴욕을 당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몇 세기 전부터 전제왕권을 성공적으로 강화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개혁이 불가능했다는 점도 들고 있다. 동아시아는 역시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정조의 '개혁'은 결국 '왕권 강화'의 강령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정조 즉위 당시 집권당 노론은 각 정부관제를 장악하고 서로 사돈을 맺어 세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선대 '탕평책'의 말로였다. 스스로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어 국가 전체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던 정조는 본인이 직접 발탁한 '초계문신'들을 직접 가르쳐 규장각에 집합시키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장용영의 친위부대를 길러 국정을 장악하려 했다. 물론 서얼자의 한계로 뜻을 펴지 못한 천재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한 면모는 가히 개혁적이었다.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모든 지식의 집합소인 '규장각'을 거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이 어용지식인 관료들은 이후 실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정조의 성리학 '르네상스'는 결국 얼마 후 세도정치의 물결을 막지 못하였는데, 시대와 역사는 정조가 '왕권 강화'를 통한 조선 개혁이 성공할수록 사회의 진보를 그 이상으로 더 늦추었을 것이라는 거대한 '역설'을 보여줄 것이었다. 조선을 바꾼 것은 정조의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가 아니라, 왕조의 명을 재촉하는 다수 민중의 반란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개혁군주' 정조의 노력은 가상하여 문무를 겸비한 총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니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을 '개헌'한 [대전통편(大典通編)], 정도전의 [진법(陣法)]으로부터 기원했을 조선의 '진법'을 정리한 [병학통(兵學通)],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3통(通)'이 그것이다. 법전을 개혁하여 국가의 세계관을 재정립하고, '병법'을 정리하여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한 것이다. [병학통]은 군대의 전체 대오를 통해 전투에서 승리하는 '진법'의 집대성이었다. 이후 이어진 [무예보도통지]는 각 군사의 개별 무예를 총정리하여 위의 '진법'에서 종합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유기적 발상이었다. 원래 조선의 국정 무예서의 시초인 [무예제보]가 참고했던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 또한 각 진영이 '원앙'처럼 찰지게 어우러지는 '원앙진'의 개별 요소로서 단병접전술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척계광의 '척가군'은 기병 중심의 중원 전투에 비해 광동과 절강성 지역을 노략질하던 왜적의 단병접전에 대응하기 위한 게릴라전과 각개전투의 기술 및 무기개발에 그 효용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척계광은 물론 역시 왜국에 대비한 무인 집안의 후예로서 무예서 [무비지] 240권을 지은 명나라 장수 모원의 또한 참고하고 있는데, 책의 앞부분에 <척소보/모총병 사실>이라는 장을 통해 위 두 장수를 간략히 소개하고 뒤 이어 <기예질의>를 통해 [무예제보]를 지은 한교가 왜란시 파견된 명나라 장수를 찾아가 '병서' 전반을 질의한 내용도 싣고 있어, 국정 무예서의 시초로서 선조대 [무예제보]의 위상을 확실히 해두고 있다.


한편, 정조의 [무예도보통지]에서 주목할 점은 '성리학 지식인 개혁군주'이고자 했던 정조답게 이 '조선 최후의 무예서' 집필을 지식인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기존 '훈련도감'에서 관장했던 [무예제보]나 [무예제보번역속집]과 달리 [무예도보통지]는 '규장각'의 지식인 박제가와 이덕무가 총괄했다. 이에 신체적 교본의 실험과 취재는 '장용영' 장수 백동수가 맡은 것이었는데, 이 지은이 셋 모두 서얼 출신의 천재들이었다. 과연 이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는 무술의 '실전교본'을 넘어 무예에 깃든 철학과 역사, 해당 무기의 잡학사 일체를 아우른다. 물론 그 사상적 기본태도는 '성리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였다.





"[검결가(劍訣歌)]에 실려 있는,

...

조선세법은 처음에 안법, 격법, 세법, 자법 등을 연습한다. 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즉 표두격, 과좌격, 과우격, 익좌격, 익우격 등이다..."

- [무예도보통지], <예도(銳刀)>, 1790.



[무예도보통지]의 서문과 각 사설의 앞부분(권수)을 지나면 1권에서 '찌름을 위한 무예'로 '창'술을 다루고 2~3권에서 '베기를 위한 무예'로서 '검'술을 망라하며, 4권에서는 '치기를 위한 무예'인 권법 및 봉술과 쌍절곤(편곤)술, 기타 마상 무예를 합쳐 '24기'에 관한 그림과 설명을 상세히 기록한다. 제목의 뜻은 '무예(武藝)'에 관한 '그림과 설명(도보:圖譜)'을 총망라하고 '완전히 달통한 기록(통지:通志)'로서 '무예(武藝)'+'도보(圖譜)'+'통지(通志)'인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만점'을 의미하는 단어 또한 '통(通)'이었단다. 과연 '성리학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던 군주 정조다운 작명법이다.

각 무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묘사, 그 원료로서 금속과 나무의 재질과 제작법은 물론 무기의 변천사 등을 박제가와 이덕무 등의 규장각 '천재'들이 취재하고 짓고 감수하며, 각 무기들의 활용법은 장용영 장수 백동수가 장사들을 데리고 시범하면서 실증한다.

각 자세들은 '태산압란세(태산이 알을 누르듯 창을 든 자세), '거정세(솥을 들듯 검을 치켜든 자세)', '복호세(호랑이처럼 낮춘 자세)', 표두격(표범이 머리를 공격하는 것)' 등의 비유적 표현이 차고 넘친다. 몇 번 따라 해보려는데 현대인인 나로서는 구현이 쉽지 않다. 하지만 '격법(치고)', '세법(베고)', '자법(찌르고)' 등의 직접 행동 이전에 '안법(눈으로 보고)'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싸움은 무기와 기술도 중요하나 '눈'을 비롯한 '오감'으로 상대를 사전 제압하는 '담력'을 최고로 치는 '도(道)'를 앞에 두는 사상을 잊지 않는다. '태권도', '유도', '검도', 하물며 '합기도'까지 '기예' 이전에 올바른 '도(道)'를 중시하는 바로 그 전통선상에 있다.



맨손무예로서 '권법'은 수많은 무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기본적 신체단련으로서 '도수체조'와 같은 성격이며, 이를 기본으로 중앙군부터 지방군까지 전국이 표준적이고 통일화되어 단련한 각종의 무기술은 각 무기의 특성에 맞게 각 군대의 진법에서 결국 유기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대전통편]에서 정립된 국가 사상이 [병학통]의 '진법' 속에서 [무예도보통지]의 각개전투술로 어우러지며 구현되는데, 이 모두를 잇는 한 글자 역시 다름아닌 '통(通)'이다.





"비록 진법을 완벽하게 구축하였을지라도 군사 개개인의 무예가 잘 갖춰지지 않으면 전투가 불가한 것으로 보고... 따라서 [병학통]을 중심으로 대규모 부대의 진법을 완성하고,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군사 개개인이 익혀야만 병법이 완성된다...

즉, 진법과 무예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성격으로 해당 진법의 변화는 무예의 변화와 직결되는 것이고, 반대로 해당 무예의 변화는 곧 진법의 변화와 연관이 되는 것이다."

- [정조, 무예와 통하다], '부록 1 - [무예도보통지] 편찬 의미와 당대의 활용', 최형국, <민속원>, 2021.



전통무예 연구가로서 '조선무예 24기'를 수련한 최형국 박사는 한문과 한글(언문)로 간행된 정조의 [무예도보통지]를 번역하고 해설한 [정조, 무예와 통하다](2021)라는 책을 내면서 정조 개혁의 '3통(通)'에서 '통(通)'을 '소통'으로 해석한다. 정조의 개혁정신을 높이 사는 저자는 정조가 펼친 이 '소통'의 가치 또한 이 책의 결론으로 가져간다.

한편, '왕정'이라면 그 어떤 형식으로든 경멸하고 반대하는 '공화주의자' 독자인 내가 읽은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는 성리학 사상과 전통무예 기술의 '소통', 진법과 각개무술의 '소통',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혁신과의 '소통' 등 이 모든 변증법적 '소통' 속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통(通)'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등패(단거리 방패)' 부대를 중거리 '낭선(대나무 가지)' 부대가 호응하고, 중거리 '장창(긴 창)' 부대는 단거리 '당파(삼지창)' 부대가 구원하는 종합전술 병법처럼 이론과 실천, 전통과 혁신이 변증법적으로 상호 어우러지는 '소통'이 정조의 시대착오적이지만 절실했던 개혁의 방향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세간의 평과 달리 문치 군주 세종보다는 무예를 숭상한 수양대군 세조를 더욱 닮았다고 한다. 세조는 성종대에 완성되는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고 선왕 문종대부터 무예서 편찬을 관장했다고 한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후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를 꾀한 이유는 반란을 막고 왕위를 지키기 위한 책략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왕조를 한층 제도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문무를 겸비한 정조 또한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내치용 개혁으로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에 불과했음에도 후세에 조선의 '개혁군주' 평가를 받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자고로 한 개인이나 소수의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북한은 2016년에 단독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남북이 함께 했었으면 좋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 역사가 전수해 준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의 이 '소통'의 비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아닐는지.



* 여담으로, 이 역해본 책의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하지만 박물관에 소장된 한문과 언해본의 영인본이나마 소장할 가치로만 해도 그 가격은 전혀 아깝지 않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435917797&navType=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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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무예와 통하다 - 正譯 武藝圖譜通志],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지음, 최형국 역해, <민속원>, 2021.


'국정본' [무예도보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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